내일의 하루살이들 3회

나는 처음을 기억해. 너를 두고 혼자 밤을 건너가던 날에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있어. 난 아무것도 잊지 않으니까. 내 것이 아닌 하루들까지도. 전부.

그래. 너는 나보다 많은 유리들을 가지고 있지. 너는 내가 헤아릴 수도 없는 처음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잖아.

응. 그런데, 그게 처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그보다 더 이전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그래. 유리, 어제의 유리를 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기억은 내가 가지고 있잖아. 꼭 내게 속해 있지 않은 기억이라도 어딘가에 이렇게 꺼끌하고 맛없는 먼지처럼 실재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럼, 너는 그 기억을 되찾고 싶어?

응, 어쩌면 내 것이 아닌 기억엔 냄새가 있을 지도 몰라.

냄새?

응, 꼭 냄새가 아니더라도. 내가 모르는 빛이나 맛 같은 게. 유리, 너는 알고 싶지 않아?

뭘?

그 상처, 어디에서 생긴건지. 누가 깨물었는지.

유리는 키득거리며 이야기했다. 소리, 아니야. 이건 누가 깨문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서 발생한 것도 아니야. 이 상처는 사건이 아니야. 이건 그냥 내 몸인걸. 나는 오늘, 네 개의 붉은 반점을 팔목에 매단 채로 태어났어. 그것 뿐이야. 누구도 나를 물지 않았고 누구도 내게 묻지 않았어.

내가 묻고 있는데.

소리의 시퍼런 입술이 달싹거리는 모양을 바라보면서 유리는 긴 날숨을 내쉬었다. 너는 그렇게 궁금해 보이지 않는걸. 이건 네 몸도 아니잖아.

유리에게 있어 바깥은 소리가 유일했지만, 소리의 내부가 언제나 유리인 것은 아니었다. 우산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사는 우산 여자의 방에서 여자의 우산을 하나씩 말리면서 보내던 하루도 있었던 것이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니?

아니에요. 소리는 고개를 저었다. 여자에게는 다리가 없었다.-그래, 내게는 꼬리도 없단다. 하고 여자는 농담처럼 웃기도 했다.- 불그스름한 치마 안쪽은 텅 비어 있었다. 푹 꺼진 치마 주름들은 바닥에 늘러붙은 채였다. 소리는 여자의 치마를 들춰볼 정도로 짖궂은 성격도 아니었고 여자 역시, 누구도 기대하지 않은 밑을 함부로 들춰보일 정도로 성급한 성격도 아니었다. 소리는 우산 여자의 어제들과 내일들을 알았으나 그녀의 이름만은 알지 못했다. 이름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알려 줄거란다. 혹시 이름을 알게 되면 네가 매일 나를 찾아와서 이름을 물을 지도 모르잖니. 더는 내가 아닌 이를 내 이름으로 불러주면 그 사람은 내가 되어버리고 말 거야. 그건 어쩐지 외로운 일이라는 느낌이 들어. 그렇지 않니?

그래요.

그래서 소리가 알고 있는 이름은, 소리가 아닌 사람의 이름은 유리뿐이었다. 그 방에서의 최초를 맞이할 때마다 유리, 하고 부르지 않았더라면 마주침들은 익숙하지 않은 처음이 될 수 있었을까. 그래도,

그래도요, 이건 불공평한 것 같아요. 당신은 내 이름을 알고 있잖아요.

여자는 눈을 흘기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렇지 않아. 너는 나보다 많은 날들을 알고 있잖아. 이 방이 어제 어땠는지도.

숨길 생각은 없어요. 이곳은 여기도 별 다를 바 없었어요. 초록색 우산이 열두 개. 분홍색 우산이 세 개, 검은 우산이 다섯 개, 빨간 우산이 열네 개. 마른 우산이 열네 개, 젖은 우산이 열 개.

셈이 맞지 않는데? 너 대충 말하고 있구나.

거짓말 하는 건 아니에요. 색깔이나 감촉 같은 건 잘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그러면 뭘 기억하는데? 키득거리면서 몰아붙이는 말투에 추궁받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소리는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말하면서도 거짓말쟁이처럼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색깔 같은 건 어디에나 있어요.

뭐?

아니, 색깔 없는 건 어디에나 있다고요. 예로 들면, 당신과 오늘 나눈 인사에는 형태도 냄새도 없죠. 물론 색도 없고요.

허둥지둥 말하면서 소리는 여자의 붉은 치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풀지 못하고 푹 꺼진 주름들. 치아가 비어있는 노인의 마른 입술처럼. 당신의 두 다리처럼. 허벅지도 종아리도 발도 발톱도 비늘도 없는 당신의 다리처럼. 소리를 갖지 못한 언어를 알아차리고 여자는 대꾸했다.

소리, 네게는 발이 있지. 물론 다리도.

응.

너, 여기까지 걸어서 왔지? 오늘이 지나면 넌 또 네가 온 곳으로 되돌아 갈거지?

응.

유리에게도 다리가 있지?

응.

그건 부러지지도 늘러붙지도 않았지?

유리의 다리가 어떤 생김이었는지, 그애의 무릎이 어떤 빛깔이었는지까지는 기억할 수 없었지만, 유리가 방안을 서성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떠올릴 수 있었다.

응. 멀쩡히 걸을 수 있어.

응. 그럼 된 거야.

여자는 어금니까지 당겨 얇게 펴진 입술을 조심스럽게 움직이였다. 입술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게 무슨 색인지 기억할 수 없었다. 여자의 얼굴빛도, 그녀의 눈 색도 떠올릴 수 없었다. 소리는 유리의 방처럼, 꿈처럼 엷은 흑백으로 퍼지는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움직이는 틈새에서 소리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면 같이 돌아가면 되잖아.

뭐?

내일은, 그애랑 같이 돌아가는 거야. 그러면, 그날의 방을 빠져나가면 그애도 내일로 건너갈 수 있을 거야. 이 차갑고 단단한 벽 밖으로 나가면 그애도 바깥이 될 수 있을 거야.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짐작조차 하지 못한 말들은 냄새도, 소리도, 색도 없는 기억으로 변해 버린 지 오래였다. 여자의 언어가 소리의 속에서 구름보다 아득하고 구체적인 먼지들로 변하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아는데? 내일이 바깥에 있다는 걸. 당신도 내일이 없으면서. 한 번도 내일로 걸어가 본 적이 없으면서.

여자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소리와 여자는 우리가 될 수 없는 방 안에서 서로의 언어가 남긴 자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

서운해 하는 기색은 없었다. 여자는 오른팔에 있는 상처를 궁금해하지 않던 유리처럼 덤덤한 말투로 자인했다.

그래. 나는 다리가 없어. 한 번도 두 다리로 걸어본 적이 없지. 기어 본 적은 있어도 주저앉은 적은 없어. 다리가 없으니까.

그래도 당신은 앉아 있잖아요. 지금.

아니, 나는 바닥에 놓여 있는 거야. 다리 없이는 앉을 수조차 없으니까.

소리는 자신이 모욕받은 듯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굵은 선으로 일렁거리는 목소리로 소리는 히스테릭하게 물었다. 당신은 우산이 아니잖아요.

우산은 걸을 수 없어. 앉을 수도 없고.

당신은 우산이 아니잖아요. 당신은, 당신은

너는 내 이름을 알 수 없을 거야. 아무리 길고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더라도 우산은 우산일 뿐이니까.

당신은 우산이 아니잖아요. 우산은 인사를 할 수도 없고 우산을 접을 수 없어요.

여자는 키득키득 웃었다. 오늘따라 그녀는 자주 웃었다. 소리로서는 도무지 미소조차 지을 수 없는 분위기에서, 그녀는 입술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웃어댔지만 그리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우산도 우산을 접을 수 있어.

인사는? 대화는?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말했잖아. 너와 내 언어에는 색깔도 냄새도 모양도 없는걸.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다리지. 발목이 움푹 들어가고 종아리에 부드러운 살이 오른 다리. 허벅지에 희멀건한 선이 배이고 발톱에는 흰 반달이 둥글게 자리잡힌 다리. 무릎에는 푸르게 젖은 노을의 색이 물든 다리. 부러지지도 구부러지지도 않은 다리. 아니, 구부러졌어도 부러지지는 않은 다리 두 개. 아니 부러졌더라도 다리인 다리 두 개. 내가 사람일 수 없는 건 기억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야. 어제를 가지지 못해서가 아니라고. 두 개의 다리를 가졌으면, 설령 그게 부러졌더라도 배를 바닥에 질질 끌고서라도 바깥으로 나갔을거야. 바깥으로 나가면 내일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거니까. 소리, 사람이 뭔지 알아?

기억?

그럼 이곳에서 하루를 넘긴 사람은 너뿐이라고, 너도 그렇게 믿는 거니?

아니요.

소리, 사람은 두 개의 다리야. 하나도, 셋도, 넷도 아니고 두 개의 다리. 그게 사람인 거야. 나는 우산이야. 어제를 기억해봐야, 내일로 건너가 봐야, 우산은 우산일 뿐이지. 기억을 갖든 갖지 못하든 우산은 우산이야. 하루를 넘어서도 우산으로 살고 싶어하는 우산은 없어.

바깥으로 가면 기억할 수 있다는 걸, 내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는데요?

그야 당연한 거지. 어제도, 내일도 이 방 안에는 없으니까. 바깥에 있겠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건 다리가 두 개 달린 네가 알겠지. 서성일 수 있는 두 다리를 가졌다는 유리도.

그애에게 홀로 나설 수 있는 바깥은 없어요. 유리가 가질 수 있는 바깥은 나 뿐이에요.

아니, 다리를 두 개 가진 사람이라면 너와 같을 거야. 네가 드나드는 바깥이라면 그애도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겠지. 두 다리가 부러졌다면 기어서라도.

소리,

여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너의 이름을 부르며 네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혼자 기억하는 게 외롭지 않니? 이름도 색도 냄새도 없는 기억들이 버겁지 않아?

그걸 누군가와 함께한다고 덜어낼 수 있는 건가요? 오히려 기억하는 나를 기억하는 너를 기억하는 나를 기억해야 하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울 미로의 겹과 겹 사이로 이어진 길 속에 갇히게 되는 건 아닌가요?

나야 모르지. 나는 영원히 사람의 기억을 가질 수는 없을 테니까. 기억이 어떤 구조로 어떻게 작동하고 얽히어 이어지는지, 나는 끝까지 알 수 없을 거란다.

잘 모르겠어요. 그애는 너무 오랫동안 방 안에 있었어요. 방들은 매일매일 끝없이 몸과 태를 바꾸며 옮겨다니고 있지만 그 모든 변화들이 그애에게는 처음일 뿐인 걸요. 당신의 방은 언제나 하나 뿐이지만.

우산은 우산일 뿐이니까. 우산은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단다. 더 젖거나 튿어져도 우산은 우산일 뿐이니까. 살이 다 떨어져도 우산은 우산이니까. 망가져도 우산은 우산이니까. 사람도 마찬가지야. 오래도록 쓰지 않은 두 날개가 망가져도 나방은 나방이고 두 다리가 문드러져도 사람은 사람이야. 두 개의 길게 뻗은 형태만 있으면 기어서라도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거란다.

모양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응. 다리는 다리의 모양이 전부야. 설령 걷지 못하더라도 그건 다리인 거야.

내일을 넘어가선 안 될 말들은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겠죠. 그애에겐.

방과 방과 방, 그리고 방의 규칙을 알고 있는 것은 소리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했다. 소리는 종종 비명을 질렀다. 귓속에서 불어나는 먼지들이 날개의 형상으로 펄럭거려도 소리는 먼지들을 덜어낼 수도 없었다. 그것은 더 이상 잊어버릴 수 없는 안쪽의 기억이었으므로. 이미 기억해버린 어제는 몸부림을 치고 귓속에 얼음 가루를 퍼부어도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간혹 소리가 날뛸 때에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를 말리지도 위로하지도 않았다. 그저 유일한 하루의 바깥이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모양을 태풍을 바라보는 아이처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제 노력으로 돌풍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듯. 유리는 도망조차 치지 않고 하얀 오늘의 방의 한쪽 구석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갈 수도 있을 텐데. 소리는 가려움에 몸부림치며 생각했다. 나를 두고 나갈 수도 있을 텐데. 유리의 방은 그리 넓지 않았다. 소리에게만 보이고 느껴지는 먼지들을 멀리 털어낼 수 없을 만큼. 부풀은 옷감들이 좀벌레에게 사각사각 갉혀먹히는 소리. 소리는 좁은 옷장 안에서 제 것이 아닌 기억들이 속살로 파고들어 알을 까는 모양을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새로 태어난 시간들은 기억을 먹고 부풀어 자라났다. 소리의 속에서 기억들은 잡을 수 없는 따가운 먼지가 되었다. 색도 냄새도 없는. 달콤하지도 역겹지도 않은, 버거운 먼지들이. 소리는 숨이 막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내일, 유리는 소리의 비명도 발작도 잊을 것이다. 유리에게 소리는 그저 지나가는 날씨에 불과한 것이다. 서로 살을 맞댈 수도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바깥. 아무리 바라도 방향을 바꾸어주지 않을 바람.

서둘러. 유리의 방을 찾아가.

아직 해가 저물지도 않았는걸요. 조금 더 생각하고 싶어요.

하루를 넘길 수 없는 비밀들을 갈무리 할 곳을 아직 찾지 못했다. 팔목에서 피가 흐를 때 까지 긁적이며 써내려간 가려움을 태워버리지도 못했다. 유리의 방에는 아직 태우지 못한 글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읽힐 수 없다면, 일몰에 소거되어 버리는 글들을 다시, 다시, 몇 번이고 다시, 노출시킬 수 없다면,

어서, 유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잠시만요, 잠시만. 오늘 하루만 더.

손톱자국이 붉게 일어나 있는 오른쪽 팔목으로 눈을 훔치며 소리는 흐느꼈다. 여자는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앞에 놓인 우산을 소리에게 밀어내었다. 소리는 푹 숙인 고개 아래로 굴러들어온 우산을 매만졌다. 덜 마른 주름 사이에는 축축하고 미지근한 물이 고여 있었다. 여자의 우산은 늘 젖어 있었다. 막힌 천장 아래로 비가 스밀 리도 없는데도. 눈물처럼 미적지근한 물기.

소리, 너는 네가 모든 하루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고 확신하니?

그럼요. 내게 있어 처음은 하나뿐이었으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걸.

아뇨, 당신과 나는 달라요.

그래. 다르지. 네게는 다리가 두 개 있고, 나는 살과 손잡이 뿐인 우산이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하루를 살고 하루를 잊지만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몰들을 겪어 왔어요. 단 하루라도 비었다면 알아차렸을 거예요. 그날 나는 겪어본 적 없는, 단절된 일출을 맞이해야 했을 테니까.

그 일몰들이 네게도 하루의 끝이었다고 믿니?

그럼요?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는 게 하루의 끝이 아니라면 뭐가 끝이라는 거죠?

끝을 알 수 있는 존재는 없어, 소리. 끝의 경계를 아무리 예민하게 직감한다고 해도 끝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사물은 없다고. 소리, 나는 한 번도 일몰을 맞이한 적이 없어. 일몰을 본 적이 없다고.

곧, 보게 될 거예요.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래, 그걸로 끝이겠지.

그래요. 그건 당신의 끝이겠죠.

너는 일몰을 몇 번이나 보았지? 천 번? 삼천 번?

모르겠어요. 세어본 적이 없으니까. 당신보다는 많이 보았겠죠. 그건 분명해요.

아니, 소리, 너는 한 번도 일몰을 본 적이 없을 거야.

저기, 나는 당신이 세어볼 수도 없는 어제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 어제와 어제, 하루와 하루, 어제와 오늘을 갈라놓는 경계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끝.

응. 그건 끝이고 일몰이죠. 나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날들을 넘어 왔어요. 밤의 초입에는 언제나 일몰이 있었어요.

그건 네 일몰이 아니겠지. 소리, 그건 네 끝이 아니야. 너는 나보다 조금 긴 하루를 보내고 있는 거겠지. 여러 날들을 보내는 게 아니라.

그럼,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저물어가는 날들은, 그리고 다시 밝아지는 날들은 뭐죠? 모두 환각이라고 이야기 할 셈인가요?

그건 내 하루고 내 일몰이지. 네 하루는 아니었던 거야.

억지에요.

소리, 너는 끝과 시작이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는가 본데, 그래서 끝과 시작을 잇는 매듭만 교묘하게 지워내면 끝도 시작도 없이 이어지는 하루들을 무수하게 반복하며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생각은 달라. 끝은 끝이야. 끝과 마주하는 접점은 없어. 끝과 마주하는 하루가 존재한다면, 그건 전혀 다른 재질과 의식의 하루겠지. 그 이전의 하루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거야. 하루와 하루가 접한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해.

그럼 내가 경험한 하루들은? 밤들은?

그건 나와 어제와 그제, 그보다 더 멀리 떨어진 날들의 고유한 끝이었겠지. 너는 끝이라는 말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 끝 뒤에 이어지는 건 없어. 뒤에 오는 건 우연히도 비슷한 몸을 가진 전혀 다른 존재인 거야. 소리, 오늘 나는 첫 번째 일몰을 보고 첫 번째 끝을 맞이할 거야. 아직 끝에 다다르지 못한 너를 두고. 그건 유리에게도 마찬가지겠지. 언어에 속으면 안 돼. 이 많은 우산들은 전부 우산이지만 같은 존재일 순 없어. 그정도는 너도 알 거 아니야. 다른 방에서 깨어난 유리는 같은 유리일 수 없어. 유리의 하루를 지나치면 유리는 죽어버리는 거야. 다시 깨어난 유리는 일몰을 맞이한 유리가 아니야. 전혀 다른 아이지. 하루에 말미에 하나의 방, 하나의 방에 하나의 유리가 죽어가는 걸 너는 매번 지나치고 마는 거야. 이제는 하루도, 하루라도 안돼. 알았지?

바깥으로 나가자.

유리는 어리둥절해하며 되물었다. 바깥? 대개 소리의 말과 행동에 의문을 표하지 않고 순응하는 편이었던 유리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일은 드물었다. 간혹 소리가 사용하는 어휘들의 의미를 확인하려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바깥이 어딘데? 여기가 바깥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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