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하루살이들 2회

이건 내 입으로 문 거야.

아팠어?

아니.

무슨 맛이 났어?

아무 맛도 안났어.

자, 어서. 너도 깨물어 봐. 이빨자국이 더럽다면 손톱이라도 괜찮을 거야. 이제 고작해야 몇 시간만 넘길 수 있으면 되니까.

너희는 붉게 출혈하며 뭉그러지는 별을 지켜보면서 서로의 손등을 깨물었다. 맨살은 짜지도 달지도 않았다.

돌아갈 곳이 없다. 소리가 무심코 집, 이라는 말을 했을 때 유리는 집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오늘 소리가 들려주지 않은 말들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소리는 돌아갈 곳, 이라고 대답했다.

돌아갈 곳은 어딘데?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해?

여기. 아침부터 줄곧 여기에 있었어.

여기는 어떤데?

모르지. 새삼스럽게 내 몸을 묘사할 수 없는 것처럼. 목소리에서 내용이 아닌 억양과 음색을 읽어낼 수 없는 것처럼. 아침부터 이곳에 있었으니까. 그럼 너는, 너는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해?

아니. 처음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너도 처음을 기억하지 못해?

응.

그럼 아마 네게도.

응. 나도 돌아갈 곳이 없어.

자, 집에서 가져온 거야.

소리가 건네 주는 빵을 유리는 거리낌 없이 받아들었다. 구운 지 오래 지난 듯 반죽은 지나치게 단단해서 유리는 사탕을 녹여 먹듯 오래도록 빵을 녹여 먹어야 했다. 사탕, 유리는 한 번도 사탕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사탕을 맛본 기억은커녕 사탕을 만져본 기억조차 없었다. 오늘 소리가 가져온 것은 딱딱한 빵 뿐이었다. 그렇지만 유리는 자연스럽게 사탕을 떠올렸다. 한 번도 하늘에 가 닿은 적 없는 이들이 습관적으로 하늘의 비유를 사용하듯이. 아니, 유리에게 있어 사탕은 단순한 추상도 은유도 아니었다. 사탕이라는 어휘는 단단하고 둥근, 혀가 까슬하고 입 안쪽 연한 살이 당기는, 구체적인 몸을 지닌 언어였다. 빙하, 뱀, 들쥐, 생일, 사탕과 유사한 어휘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유리는 출처를 알지 못하는 반점과 같은 어휘들이 제 살 속에서 우글거리는 것을 느꼈다.

기억은 무척이나 자의적인 개념이야. 그렇지 않아? 유리. 네 기억이 꼭 네게 속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는 어제의 너를 기억해. 어제의 너는 내게 속해 있어. 너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 너를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돼.

설명할 수 없는 박탈감이 찾아들었다. 소리, 내 기억이 네게 속해 있다고? 나로부터 온전히 떨어져 있다고 해도 그건 내 기억인 거라고?

떨어져나간 손톱을 주워먹은 쥐는 한때 손톱의 인격이었던 이로 둔갑한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출처 또한 알지 못한다.

괜찮아. 기억이 꼭 그걸 최초로 경험한 사람에게 속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어. 나는 어제를 기억하고 너는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달라진 건 그것 뿐이야.

아니, 유리의 세계에선 어제를 넘어서 변한 것은 무엇도 없었다. 변화는 오로지 소리에게 속해 있는 개념이었다. 유리는 무언가를 빼앗겨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기실 너는 아무 것도 잃은 적이 없음에도.

얼어붙은 나무에서 이파리들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별이 떨어져내리면서 온도가 높아진 탓이었다. 별의 뒷면이 뿌리보다 낮은 곳으로 떨어지고 나면 죽은 이파리들도 다시 얼어붙을 것이다. 흰 반점들이 돋아난 나무에는 다시, 얼음 번데기들이 죽은 살을 매달고 살아갈 것이다. 소리는 유리가 이해할 수 없을 문장들을 쏟아내었다. 유리는 여느때처럼 수긍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소리의 언어를 듣고 있었다. 노을의 침묵을 우두커니 지켜보는 밤의 시인들처럼.

유리, 환상이 현실로 떨어질 때의 낙차를 좋아해. 환상이라는 말을 알고 있니?

일몰이 지났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별이 사라진 장소는 풍경을 잃었다. 빛도 없이 이동하는 숨들이 색을 잃은 사물들을 덧없이 할퀴는 소리가 떠돌았다.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

응.

머리가 꼬리보다 긴 뱀처럼 흐릿하고 느린 대답소리였다. 유리의 오른팔에 벌어진 신선한 상처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유리는 고통을 잊었다. 그날, 상처의 유래에 대해서는 끝내 묻지 못하였다. 잊어버린 이야기는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체취를 잃은 유년과 마찬가지로. 누구도 깨문 적 없는 상처에 비밀은 없는 것이다.

다음날, 유리는 제 옆에서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두 눈을 마주하며 태어났다. 안녕, 네 이름은 유리야. 그렇지? 그래. 나는 유리야.

나는 네가 간절하지 않아. 네가 나를 기억하지 않듯. 이름이 없던 때를 기억해? 내가 네 이름을 물어보기 전에 넌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었어?

유리는 설명할 수 없는 박탈감이 입안을 틀어막는 것을 느꼈다. 유리는 몇 번째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기억하고 싶어. 소리.

유리는 눈을 감은 채 그을린 오른팔을 내밀었다. 질긴 거미줄에 엉킨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움직이려 했다면 얼마든지 움직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른팔 대신 왼팔을 내밀 수도 있고, 고개를 숙일 수도 있었으며 잰걸음으로 한 번도 나서 본 적 없는 바깥으로 떨어져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리는 그 모든 가능한 동작들 대신 오른팔을 어깨와 평행하게 위로 들어올리는 간단한 동작만을 행하였다. 기억하고 싶어, 이 말과 견고한 끈으로 유착된 것처럼 유리의 희망은 유리의 오른팔을 끌어올렸다. 소리는 유리의 팔목을 다시, 처음으로 깨물었다. 팔목에서는 어떠한 맛도 느껴지지 않았고 유리는 고통도, 심지어는 간지러움조차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무덤덤한 눈길로 팔목을 바라보았다.

너희의 일과는 간단했다. 어디에선가 소리는 유리를 찾아온다. 소리는 유리의 이름을 묻는다. 너는 유리지? 응, 나는 유리야. 유리는 유리라는 이름을 세례받은 기억은 없지만 언제나 자신이 유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두 아이에게 있어 이름이란 최초의 경험을 하기 이전부터 선험적으로 지니고 태어난 천성과 같은 것이었다. 너희는 출처도 모르는 버릇을 앓듯 이름을 알려 주었다. 너는 유리야. 응. 너는 소리야. 소리는 어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유리가 팔목에 새겨진 상처의 유래를 물었다면, 어쩌면, 소리도 유리의 기억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어제 너는 내일을 맞이하기를 꿈꿨다고. 그래서 기억보다 수명이 긴 흔적을 그곳에 새긴 거라고. 유리는 모어가 침과 함께 흘러나오는 입술에 대해 묻지 않듯 불그스레한 상처들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 애는 그것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었다. 깨물린 상처는 오늘 태어난 유리의 몸이었다. 오늘, 유리는 깨물린 적이 없었다. 오늘, 유리는 내일로 건너가기를 희망한 적이 없었다. 오늘, 유리는 제 몸을 만든 소망들을 잊었다. 소리는 유리의 곁에 머물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대개는 소리 스스로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공상들이었다. 어떤 날의 유리는 내일을 기억하고 싶어했고 어떤 날의 유리는 그 꿈을 입 밖으로 내뱉었으며 어떤 날의 유리는 침묵할 뿐이었다. 어쩌면 유리의 태도는 소리가 재잘대는 이야기들에 따라 달라지는지도 몰랐다. 그날 소리가 내뱉는 첫 번째 어휘-그것은 대개 이름을 묻는 말로 정해져 있었지만- 혹은 소리의 억양, 침묵과 발화가 섞이는 적절한 리듬에 따라 유리는 내일을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물론 그러한 패턴을 정확하게 파악할 재간은 소리에게 없었다. 소리의 이야기는 이성이 아닌 영감에 의하여 오줌처럼 흘러나오는 이미지들이었으므로, 소리는 그저 해야 할 말들, 도저히 내뱉지 않을 수 없는 말들을 복받쳐 쏟아낼 뿐이었다. 기억하고 싶어, 그리고 유리의 오른팔을 깨물 뿐이었다. 소리는 무수한 날들을 되사는 느낌을 받았다. 소리의 하루들은 무수한 대화들의 변주였다. 그것은 대개, 같은 주선율 속에서 되풀이되었다.

눈,

송이,

얼음,

기억,

춤,

너희는 떨어지는 눈을 보며 기억나는 말들을 한 음절 한 음절씩 내뱉었다.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눈을 감았다. 누군가는 보았고 누군가는 잊었으며, 누군가는 기억하였고 누군가는 멀어졌다.

타들어가는 불 속에서 소리는 몇 번이고 버려진 문장들을 읽었다. 태워버린 언어들이 뭉개져서 목 안쪽으로 박혀들어갈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밖으로 나가고 싶어. 소리, 너는 여기가 어딘지 알아? 길을 알고 있어?

시간에는 길이 없었다. 네게는 내가 아닌 바깥이 없어. 그런데도 매일 잊어버리는 건 누구지? 잊히는 건 누구지?

너는 너희의 손목 안쪽을 깨물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나는 추억을 얻어가고 있어. 그런데 유리, 네게는 아무 냄새도 맛도 나지 않아. 지시체 없이 동떨어져 가물거리는 활자들처럼. 발끝과 머리로부터 떨어져 방랑하는 그림자처럼. 기억은 내게 있는데도 여전히 네 것이기 때문일까? 유리, 나는 내가 만들지 않은 무수한 기억들을 갖게 되었어. 하루를 잊어가는 너희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기대와 후회들을. 더 이상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기억들이 쌓여가. 나는 더 이상 무엇도 느낄 수 없어. 코끝까지 향을 잃은 먼지들이 쌓여서 나는 너희들이 아닌 것을 감각할 수조차 없어.

유리는 이해할 수 없는 기호들을 바라보듯 소리의 음률이 구부러지고 퍼져나가는 모양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유리, 돌려줄까?

그 날부터 소리는 글을 썼다. 응, 내 이름은 유리야, 소리는 유리에게 편지를 건네듯 오늘을 건너기 전에 불속에서 불타버릴 문장들을 건네었다. 유리는 배운 적도 없는 문장들을 소리내어 읽어냈다. 투명해 보이지만 부풀은 몸으로 빛을 굴절시키는 눈처럼 유리의 목소리를 변형시키는 문장들이 소리의 목소리로, 글자도 언어도 경유하지 않고 곧장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소리, 네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어.

날이 갈수록 소리는 돌아가는 것이 허탈해졌다. 매일과 매일 사이의 여백을 줄이면 목까지 차올라 넘실거리는 먼지들이 덜 버겁지 않을까. 유리, 돌아갈까?

대답하지 않았다. 너는 믿지 않았다. 검은 건반 위에 드러누운 사람의 몸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 너는 알지 못할 것이다. 소리는 유리의 옆에 몸을 뉘였다. 눈을 감고 입속을 파고드는 나방의 마른 날개를 느꼈다. 혀끝이 축축하게 말라갔다. 날개를 검게 축여낸 날개들은 무거워진 몸을 들썩거리면서 입술 밖으로 새어나갔다. 유리는 소리의 옆에서 밤이 시꺼멓게 배인 글자들을 읽고 있었다. 소리, 어제의 유리가 나와 같은 몸을 가졌다는 게 정말이야? 아니. 어제 유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팔꿈치 안쪽을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손등이랑 손목을 몇 번씩이나 깨물지도 않았고. 봐, 너는 팔목에 깨문 자국 투성이잖아. 어제 유리는 훨씬 말간 팔을 가지고 있었어. 지금보다 더 고분고분했고. 그나저나 이곳은 정말 검구나. 너, 잘도 읽는다. 이렇게 어두운데.

어둡니?

응. 출구와 입구가 구분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출구가 아닌 입구로 들어설까봐 무서워서 감히 밖으로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어둡구나.

잘 모르겠어?

난 꼭 이만큼 어두운 곳에서 태어났으니까. 더 밝아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본적도 없어.

그래. 아마 내일은 더 밝은 곳으로 옮겨가게 될거야.

그건 나랑은 상관 없는 일이야.

그래도 내일과는 상관 있는 일이지. 나는 내일로 건너갈 테니까, 나랑도 관련 있는 일이고.

그래, 그래도 내, 일은 아닐 거야.

유리의 방들은 불어나고 있었으나 그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너희는 수천 개의 방들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하나의 몸에는 하나의 정신이 깃들어야 한다는 고전적인 규율을 강박적으로 따르듯 하루의 기억이 머무는 하나의 몸은 다른 하루의 기억까지는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소리는 하루를 넘기게 된 이후로 지나가는 방들이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을 눈치채었다. 구태여 표시를 남길 필요도 없었다. 깨무는 날과 깨물린 날 매번 달라지는 오른팔의 상처들처럼 방들은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방에서는 불에 녹아내린 케이크의 진득한 냄새가 진동했고 어떤 방은 온통 어두웠으며 어떠한 방은 나무들과 나방들이 무리를 짓고 어울리는 작은 숲처럼 조성되어 있었다. 유리는 방과 방들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애에게 방은 오직 하나 뿐이었으므로, 길고 구부정하게 이어진 미로와 같은 방들이 있다는 말을 어렴풋한 형이상학처럼 받아들이는 듯했다. 흩어지며 어둑하게 젖어드는 유리 속 빛을 바라보듯이. 돌아가자는 말을 꺼내었을 때, 소리는 자신이 어떠한 지점을 지칭하는 말을 하였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내일을 기억하기 이전의, 첫 번째 하루로 건너가지는 말이었는지, 어제의 유리가 최초와 최후를 맞이했던 방으로 되돌아가자는 말이었는지, 수백, 수천 개로 불어난 방들 중 어느 하나로 돌아가자는 말이었는지, 어제 너희가 나누었던 깨물린 상처의 맨살로 돌아가자는 말이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선택지는 빽빽한 벌집처럼 불어났지만 소리는 까마귀의 눈으로 지긋지긋하게 불어난 방들의 벽과 벽을 벌려 내려다볼 수 없었다. 유리는 돌아가자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직 돌이킬만한 처음의 순간조차 그애에게는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소리는 유리의 팔목을 깨물었다. 여느 때라면 미동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그날 유리는 평소보다 오래 아파했다.

소리와 유리는 하나의 육체를 공유하듯 하나의 방을 함께했다. 안녕, 유리. 응, 나는 유리가 맞아. 유리는 소리의 언어를 의심하지 않았다. 유리에게 소리는 유일한 자극이고 바깥이었으므로. 일생동한 초록으로만 이루어진 프리즘의 방 안에서 갇혀 지내던 여자가 바깥의 붉은색을 보고서야 믿었던 붉음의 심상과도 같은 존재가 소리였다. 푸르기만, 붉기만, 혹은 검기만 한 세계 속에서 세계는 고유한 색의 명암으로만 이루어졌다. 유리의 세상은 언제나 푸른 흑백, 붉은 흑백, 초록 흑백,-혹은 그저 흑백이거나-, 흑백 뿐이었다. 그것은 유리의 세계의 규칙이었다. 하나의 방에 깃든 색은 하나 뿐이다. 언젠가 최초를 맞이하던 날에 소리는 푸르스름한 거미줄이 말간 햇빛을 머금으며 오묘한 색들로 반짝이던 숲의 정경 속에 뭉뚱그려진 붉은 빛 얼룩이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보다 이전의 기억에 대해서는 그 역시 알 길이 없었다. 간혹 꾸는 꿈은 진하게 물들어 있었지만 색이 없었다. 꿈 속에서 소리는 개처럼 사물의 체취와 농담만으로 마술적인 색상들을 구분하였다. 언젠가부터 유리의 방은 꿈처럼 단일한 색의 층위로 겹겹이 쌓여 있었다. 단 한번도, 소리와 같은 색인 적이 없는 색들이 유리의 방을 물들였다. 유리의 방은 마치 꿈처럼 검거나 푸르렀다. 유리에게 도래하는 유일한 색, 농담의 규칙을 벗어난 색은 소리가 유일했다. 유리에게는. 매일 유리가 나고 죽는 동안 소리는 유리의 세계의 규칙들을 익혀갔다. 하나의 방과 하나의 색. 유일한 바깥은 소리 뿐. 그것을 제외하면 다른 특징들은 들쑥날쑥했다. 어떤 날의 방은 천장이 뚫려 있어 소름끼치게 시퍼런 하늘이 훤히 들여다 보였고, 어떤 날의 방은 벽과 같은 색의 시꺼먼 흙이 발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유리는 처음을 맞이한 방의 환경에 쉽게 적응하는 편이었다. 턱 끝까지 투명한 물로 차올랐던 날에 유리는 하얀 원피스와 면 속옷을 벗고 맨몸으로 온종일 헤엄을 쳤다. 시꺼먼 나방들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너희의 피부를 향해 달겨드는 날에는 나방의 날개를 맨손으로 잡고 멀어버린 두 개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고, 희멀건 햇빛이 발등을 불그스레하게 익히는 날이면 하얀 농담으로 눈을 태웠다. 하나의 방과 하나의 색, 명과 암을 벗어난 색은 오로지 소리 뿐. 유리는 규율을 벗어난 색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개 소리는 일몰 후 잠든 유리를 내버려 두고 바깥으로 나갔지만 유리와 함께 하루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도 간혹 있었다. 간혹 방안이 시꺼먼 밤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입구도 출구도 보이지 않을 때, 혹은 나방의 분진들처럼 내장을 텁텁하게 덮어오는 기억들에 숨이 막혀 쓰러져 잠을 잘 때가 그러했다. 방 밖을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어올 때에, 소리는 어휘나 좌표로 명명되지 않은 방위에 대한 지식을 오로지 앞으로 쭉 뻗은 머리와 두 다리만으로 가늠하여 실현시켰다. 조감도를 바라보는 미로 위 까마귀의 눈으로 방과 방들의 수형을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소리는 조금도 헤매지 않고 유리의 방까지 찾아갈 수 있었다. 소리 자신도 길을 찾는 원리를 알 수는 없었다. 유리에게 들어가고 나가는 길을 반추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두 허벅지를 앞으로 밀어내다보면 몇 개의 물린 자국을 팔에 매단 네가 보인다. 안녕, 유리, 네 이름이 유리 맞지? 응, 나는 유리야. 응, 대답하는 너는 항상 유리이다. 어쩌면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방들에는 각각의 물린 자국을 매달거나 매달지 않은 유리들이 저마다의 창문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고 소리가 망설임없이 들어가 이름을 물은 유리는, 소리의 물음-너, 유리 맞지?-에 비로소 유리로 태어나는 지도 몰랐다. 유리와 유리 아닌 자들의 하루들이 각각의 방에 무수하게 병존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소리에게 오늘의 유리는 유일했으며, 그것은 오늘의 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했다. 물론 소리는 유리가 아닌 다른 이들의 방들과 그들의 어제와 그들의 오늘과 그들의 내일, 그들의 후회와 기도, 그들의 규칙들과 그들의 이름들 역시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으나, 유리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소리에게 유일한 현재는 유리였다. 다른 기억들은, 심지어 어제의 유리조차도, 소리에게는 체취와 빛을 잃은 유령에 지나지 않았다.

유리, 너는 이곳에 오던 날을 기억해? 처음을 기억해?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네게 처음은 그리 바래지 않은 근처에 있었다. 너무 멀지도, 멀어지지도 않고 지척에서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는 선명한 울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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