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소리와 함께 할 때처럼 불을 켜고 책을 읽었는데 참을 수 없는 육성의, 그녀의 지친 목소리에 치를 떠는 중 눈앞에서 쥐색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곧 거울 속에 비친 그녀가 자신의 육성이었으며, 그 거울 때문에 혼잣말이 그대로 되비치는 것이었음을 깨닫고 들고 있던 책을 원시 시대의 돌망치처럼 사용해 거울을 내리찍어 산산조각냈다고 했다. 거울의 속은 놀랍도록 편평했고 더 이상 어떤 목소리도 비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이후부터는 불을 끄고 여자의 인영이 보이지 않음을 확인한 뒤에야 서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바깥의 방을 드나들던 누군가가 서재에 널브러져 있던 거울의 시신과 유리 파편들을 말끔히 치우고 난 뒤에도 그녀는 한동안 마음놓고 독서하지 못했다. 그녀는 혼잣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거울 속에서 살고 있던 누군가를 살해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아무런 상상도 없이 이 지독히 좁고 친숙한 방 안에서 끝없이 증폭되어가는 하루를 견딜 수 없었고, 더 이상 이전에 어떻게 독서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므로 어찌할 수 없이 독서를 계속해나갈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래. 그래서 난 불을 끄고 글자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어. 아무도 내게 글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래서 난 내 상상의 범위 바깥에 있는 것들을 마음껏 상상할 수 있었지. 글자들의 형상 문자들의 배열, 동그란 철자와 기울기, 잉크의 얼룩들을 어둠 속에서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것이 지시할 수 있는, 혹은 지시할 수 없는 모든 가능성들을 차례차례 떠올려 보는 거야. 나는 매혹적인 이미지들이 글자 속에서 무수한 거울상을 겹치며, 서로를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모습을 조용히 배웅하곤 했지.
늙은 여자는 그녀만의 독서행위를 이어나갔다. 감히 훔쳐볼 수도 따라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그녀는 지나치게 우회적인 방식으로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결국 그녀가 바라보는 어둠 속의 투명한 글자들은 모두 그녀의 안에 있는 목소리일 것이고 그녀는 같은 말만을 중얼거리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런 목소리라도 되뇌이지 않으면 견딜수가 없다는 듯 계속해서 책을 읽어나갔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풍부한 화음으로 침묵하며 일렁거리는 활자들을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에 있는 모든 글자들을, 그게 죽어 번진 먼지까지도 전부 읽을 줄 알게 되면 알 수 있을까. 아니, 알기를 바라는 건 결코 알 수 없을 거야. 너도 그걸 알고 있어. 그렇지?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은 하나의 어휘조차 새로 배우지 못할 것이라고, 당신이 읽어나가는 어휘들은 모두 당신의 눈속에 담겨 있는 것이라고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그녀의 혼잣말에 일일이 대꾸해 주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그녀의 곁에 있었던 것이다. 너는 이미 그녀의 목소리였으며, 더 이상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너는 그녀와 함께 독서할 수 없었다. 넌 목소리를 빼앗긴 인어공주가 마녀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목소리로 읊조리는 낯선 언어를 듣듯 여자가 독서하는 모습을, 그녀의 안에서 더 이상 네 것이 아닌 목소리가 숱한 목소리들과 뒤섞여 기묘한 형상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너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으나 늙은 여자는 아랑곳 않고 혼잣말을 이어나갔다. 알 수 있을까. 읽을 수 있을까. 알 수 있을까. 읽을 수 있을까. 너는 알고 있어. 그렇지?
소리는 참지 못하고 대꾸했지만 여자는 네 대답을 듣지 않았다. 넌 네가 여자의 독서 속에서 산산조각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자는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아이처럼 네 얼굴이 깨지며 네 하루가 기이하게 늘어나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너를 읽고 있었다. 그녀는 너의 일그러진 왜상에서 피어나는 가능성들을 바라보았다. 시꺼먼 눈, 자글자글한 피부의 주름은 아랑곳 않고 마냥 맑고 반들거리는 눈이 너의 빛과 형상을 빼앗고 아른거리고 있었다. 앞으로 돌출되어 있기보다는 오히려 머리뼈의 안쪽으로 함몰된 듯한 두 개의 구멍, 그 속에 속하지 않은 모든 현상들을 더듬는, 가로챌 수 없는 빛의 입자들을 서글프게 더듬는 감관. 저를 드나드는 빛의 독특하고 보편적인 배열을 무력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소리. 눈을 떠 봐. 난 이제 잘 보이지 않아. 어둠 속에서 들여다 보는 게 습관이 되었어. 넌 내가 어둠을 너보다 잘 응시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너보다 강렬하게 살아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내가 바위틈에서 서로의 살 속에 성기를 집어넣는 바퀴벌레보다도 징그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들어보렴. 난 이렇게 살아있고 싶지 않았어. 소리, 너는 알고 있니? 우리가 나날이 늙어갈 뿐 썩지는 않는다는 걸? 우리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견뎌 왔다고 생각해?
당신은 차를 끓여주잖아요. 육식주의자들에게는 고기를 내어 주기도 하고요. 난 당신과 처음 만난 날 당신이 차려준 소의 고기를 먹었던 걸 기억해요.
소의 고기라고?
그래요. 틀렸나요?
난 네가 양의 고기를 먹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럴리가요. 우리의 기억이 틀릴 리 없어요. 우리는 결코 잊지 않으니까. 잊지 못하니까.
소리. 스테이크의 맛과 향을 기억해?
아니요.
나도 마찬가지야. 난 네가 바깥에 나가 있는 동안 한 번도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지 않았어. 난 그리 허기지지도 목이 마르지도 않았지. 서재에 틀어박혀 어둠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난 그다지 죽어가고 있지도 않았어. 넌 바깥에서 뭘 좀 먹었니?
아니요. 아니, 기억나지 않아요.
기억나지 않는다면 먹지 않은 거겠지. 네가 말했듯 우리는 아무것도 잊을 수 없으니까. 네가 돌아온 이후로도 난 한 번도 네게 음식을 차려준 일이 없는데. 너 혼자 음식을 꺼내 먹은 일이 있니?
아니요. 하지만 그건 모두 마찬가지잖아요. 유리도 내가 음식을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어휘들은 어째서 우리와 동떨어진 걸까.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어휘들이 우리를 구성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럼 우리는 무얼 기억하고 있는 건가요? 썩어가지 않는담 살아 있는 게 아니라면서요.
난 그런 말까지 한 적은 없어.
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침묵 속에서 늙은 여자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눈 먼 손이 점자를 더듬어 미세한 홈 사이사이에 배어든 목소리를 읽어내듯 페이지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종이들의 배열에 어떠한 법칙이나 의미가 있는 것 마냥. 너는 뒤집힌 사진들을 차례차례 뒤집어보는 손짓에서 어떠한 인과를 찾아내듯, 폭풍우의 한가운데에서 바다의 비명에 뒤섞인 모스 부호를 읽어내듯, 여자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들었다. 너도 수술을 받았지? 하고 파도가 속삭였다.
네.
나도. 난 의학박사한테 수술을 받았는데 그의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아. 아마 수술을 받은 이후에 그의 이름을 듣지 못했기 때문일 거야. 너도 그렇겠지만 수술을 받던 날의 일은 태어나던 날의 저녁처럼 혼란스럽게 느껴지니까.
난 태어나던 날의 기억이 없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우린 태어나던 날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어. 탄생, 유년, 향기, 질감, 사랑이나 연애와 같은 말들은 우리와 무관한 단어들이지만 우리는 그 뜻을 잘 알고 있지. 유리나 우산, 사람이나 자연과 같이 우리가 속한 어휘들처럼.
어쩌면 난 태어난 적이 없을지도 몰라요. 난 죽음이란 단어를 알지만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죽지 않고 죽어가는 거야. 아니, 어쩌면 이 말도 틀렸을지도 몰라. 살아 있지 않으면 죽어갈 수조차 없으니까. 나날이 죽어가는 건 살아 있는 생명만의 특권이니까.
수술 이야기를 계속 해 주세요. 당신 말대로 나 역시 수술에 대한 기억은 어렴풋할 뿐이니까. 그저 얼음사막이라는 말이, 나와는 무관해 보이는 말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애틋하게 느껴졌어요. 물론 수술 전의 기억은 그날 하루뿐이지만, 난 얼음사막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마치 수만 번의 속삭임을, 속삭임의 잔음을 함께 듣는 것만 같이 괴로웠던 기억이 나요. 같은 방에 있었던 유리에게 그 단어를 아느냐고 물었지만 그 애는 고개를 저었어요.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죠. 우리는 같은 곳에서 눈을 뜨고 같은 어휘를 나누며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어째서 내가 아는 그 말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는지. 난 의심을 품기 시작했어요. 그녀와 내가 있는 공간이 같은 곳이 아니라는 의심, 그녀와 내가 사는 시간이 같은 순간이 아니라는 의심을요. 난 더 이상 그녀와 같이 있는 듯한 환각 속에서 사는 일을 견딜 수 없었어요. 그 날은 유독 낮이 길었죠. 어느틈엔가 사라진 천장 위에서 해는 눈부실 정도로 차고 희게 떠올랐어요. 난 그 날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죠. 얼음사막이라는 말을 홀로 아는 채로 그 애의 곁에서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마칠 자신이 없었어요. 난 그 애를 구해주겠다고, 네게도 그 말을 알려주겠다고, 내일로 건너가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건 핑계에 불과했을지도 몰라요. 무엇보다도 나는 그 애와 헤어지고 싶었어요. 그 애의 시간으로부터 그 애의 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어요. 난 산이나 바다, 설원과 같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단어들을 알고 있었듯 당연하게 박사의 존재와 그와 연락할 수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어요. 난 눈을 감고 박사의 이름을 불렀죠. 그에게 소원을 빌면 들어주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망설임 없이 내일로 건너가고 싶다고 이야기했죠. 박사는 문을 열고 나오라고 했어요. 난 문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 어휘인지 곧바로 알아차렸죠. 그 날, 하루를 살도록 태어나 하루를 지새우던 그 순간까지 난 단 한 번도 문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본 적이 없었지만, 어째서 문이라는 어휘를 잊고 있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문은 가까운 곳에 있었어요. 그날 밤, 유리의 방 문은 처음으로 열렸고 그제서야 나는 우리가 닫힌 문 속에 갇혀 있다는 걸, 문은 처음부터 잠긴 적도 숨겨진 적도 없이 방의 한쪽 면에 고요히 있었다는 걸,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방에 더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예컨대 반쯤 열린 옷장이나 우산, 굽이 높은 신발들과 눈사람과 같은 것들-, 그리고 방의 바깥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난 두 다리를 교차시켜 매끈한 땅을 맨발로 내딛으며 바깥으로 나갔죠. 유리는 깨어 있으면서도 나를 보지 못하고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아마도 그녀가 여전히 문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거예요.
내 경우에는 박사가 내 방 안으로 찾아왔어. 그는 명함을 건네면서 오늘 하루가 지나기 전에 얼른 진단을 마치고 치료까지 해야한다고 말하더구나. 나도 하루를 넘길 수는 없다는 걸 땅 밖으로 나오자마자 서둘러 살을 섞는 매미들처럼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내의 말에 순순히 응했지. 그는 청진기로 내 아랫배를 더듬더니 내 자궁에서 암이 자라나고 있다고 말했어. 난 그 간단한 진료 방식과는 상충되는 무시무시한 병명에 치를 떨면서 그를 믿을 수 없다고 했지.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이 나를 속일 이유가 없다고 말했어. 그로서는 최대한 빨리 진단을 마쳐야 했고 그래야 치료를 할 만한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면서, 우리가 논쟁을 하는 이 순간에도 시간은 지나가고 있다고 말했어. 난 그래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다고 했어. 그러자 그는 사실 진단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말하더군. 그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일종의 위약에 불과하다고. 진료를 하든지 하지 않든지 내가 자궁암에 걸렸을 확률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 분명한 확률을 무시할 경우 어떤 재앙이 초래될지 그 자신도 짐작할 수 없다고 했어. 난 공포에 온몸이 얼어가고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의사는 기이할 정도로 늘어진 얼굴에서 고장난 테이프처럼 삐걱거리는 말투로 천천히 속삭였어. 이건 맹장을 미리 들어내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어차피 방 안에 홀로 남겨진 나는 평생 아이를 낳을 수 없을 테고, 불필요한 기관인 자궁은 암의 발원지라는 끔찍한 가능성을 내포한 채로 나날이 하나의 가능세계로 나아가며 변해갈텐데, 그런 무모하고 무의미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했어. 난 그 순간 지독한 멀미에 헛구역질을 삼키며, 단지 사내의 기묘한 연설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며 고개를 끄덕였지. 그러자 박사는 나를 눕히고 곧바로 마취약을 주사했어. 박사가 수술도구를 들고 오는 걸 본 기억은 없었지만, 그 자리에 무엇이 있는지 꼼꼼히 살펴볼 수 있는 여력이 없었으니, 아마 내가 보지 못하던 사각에 메스나 가위, 수술용 실 같은 것들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며 깨어났을 때, 난 일순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다고, 그러니까 그 순간 다시 태어났다고 느꼈지만 천장 높은 곳에 매달린 누런 달을 보고 아직 하루가 채 저물지 않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어. 박사는 잘 되었다고 당신이 깨어나지 않아 수술의 결과도 이야기해주지 못하고 돌아가야 할 뻔했다고 이야기하며 적출한 자궁을 들어보였어. 포르말린 용액 속에 담긴 자궁은 끔찍할 정도로 시꺼맸지. 그는 이렇게 죽은 피가 많이 고여 있는 자궁은 곧 암 세포가 자라났을 확률이 높다면서 역시 수술을 하기를 잘했다고 이야기했어. 난 처음부터 내 뱃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어. 허탈감도, 공허함도, 심지어는 배설감조차도 없었지. 혹시 사내가 다른 누군가의 자궁을 가지고 내게 속임수를 쓰는지 궁금했지만, 곧 그런 의심도 접었어. 어쩌면 사내는 다른 이에게 똑같은 수술을 하며 내 적출한 자궁을 보여주며 그의 자궁이라고 속일 지도 모르지만, 자궁들은 모두 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어쨌든 그게 사내의 자궁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난 자궁의 진위에 대한 의심을 버리기로 했어. 어쨌든 그 이후로 난 정말 생리를 하지 않았으니 그 자궁은 정말 내 것이었는지도 모르지. 사내가 문을 열고 나가기 전, 내가 두 번째로 문이라는 개념을 상기하기 전에 사내는 내게 서비스로 한 가지 수술을 더 해주었다고 말했어. 나팔관에서 자라나는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이제는 쓸모 없는 자궁 전체를 들어내는 수술을 해 주듯, 자신을 믿고 어려운 수술을 맡긴 내게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는 거야. 그는 내 머리 뒤쪽에 칩을 심어놨으며, 그걸 가지고 있으면 이제껏 겪지 못했던 일을 경험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어. 내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사내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문을 열고 나갔지. 난 감히 사내가 드나든 문을 열고 그를 쫓아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어. 난 단 한 번도 문을 열고 나간 적이 없었으니까. 그가 사라지고 나자 문은 잘 보이지도 않았지. 바깥으로 연결된 깊은 틈새는 순식간에 엷은 홈으로 변하더니 시선 밖으로 사라지고 말았어. 아마 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겠지만 난 더 이상 그걸 인식할 수 없었지. 그리고 사내의 말대로 난 생애 처음으로 하루를 건너갔어.
하루를 넘기게 된 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도, 나도.
그래. 물론 우리에게 어떠한 인과가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세상에는 하나의 끝에서 다른 끝으로 이어진 인과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모든 일에서 이유를 찾는 습관은 단지 지성의 항상적인 작용을 돕기 위한 환상에 불과하니까.
어쩌면 우리가 건너간 하루는, 끝 없이 펼쳐졌다고 생각했던 대양은 단지 이 서재로 흘러들어오는 작고 좁은 골목길이었는지도 몰라요.
소리, 네게 이 서재를 상속하고 싶어. 하지만 우리가 단지 기억을 저장하는 한 권의 책에 불과하다면 내가 읊었다던 시는 다 어디로 가는건지, 그것만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어.
당신은 서재를 상속할 수 없어요. 바깥은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으니까. 이 서재도 기억도 당신의 것이 아니니까.
징그럽고 추잡할수록 더 오래 살아남는다고 생각하지 않니. 굶주린 바퀴벌레나 쥐떼들을 생각해봐. 최후의 순간에 날개와 꼬리를 펼치고 죽어가는 것들의 뱃속에는 날개와 꼬리를 조심스럽게 접고 주둥이를 시체의 발 밑으로 내밀며 떨어져가는 새로운 생명들이 드글거리기 마련이지. 너도 알겠지만 나는 꽤 오래 살았단다. 그리고 갈수록 더 확실하게 살아있다는 걸 느껴. 시간은 무서울 정도로 제멋대로 흐르니 더 이상 시계를 믿지 않게 된 지도 오래 되었단다. 넌 늙을수록 무감해지고 초연해지리라고 짐작하고 있겠지만 꼭 그런 건 아니야. 아마 난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 생명이 될 거야. 어쩌면 너보다도 오래.
그럴지도 모르죠. 전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기억들 말이에요. 이제는 포화상태라는 생각이 들어요. 머리가 저려서 견딜 수가 없거든요. 난 새로운 어휘를 낡은 어휘와 이어서 말을 만드는 요령조차 잊어가는 것 같아요.
그럴 리가. 넌 아무것도 잊지 못하잖아.
그렇죠. 기억하는 건 무엇도 잊을 수가 없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니, 나는 달라. 넌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요즈음 난 무서울 정도로 많은 것들을 잊어가고 있단다. 이 서재의 비밀, 제 살을 먹던 사람들의 표정, 식탁 주위를 서성거리며 중얼거렸던 숱한 한탄들, 그것들이 있었다는 것만 확실할 뿐 그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아. 아마 살기 위해 그런 거겠지. 팅팅 불은 머리가 터져버리기 전에 삶의 잡다하고 구체적인 내용들은 싸그리 지워버리고 있는 거야. 그렇게라도 나는 살아갈 거란다. 불타버린 서재에 더 이상 불도 재도 책도 글자들도 남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 이 자리에 불과 재와 책과 글자들이, 그 언어가 존재했다는 사실만을 기억하면서 살아갈 거야. 그렇게라도.
난 잃어버린 기억의 맛과 냄새를 찾고 있어요. 그렇게라도 다시 살고 싶은 기억이 당신에겐 없는 건가요.
그래. 구태여 되돌이키고 싶은 기억같은 건 내게 없단다. 아마 이곳을 드나드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거야. 잊지 못해 사는 거지. 그런 말을 들어본 적 없니?
글쎄요. 들어본 것 같기도 해요. 어쩌면 당신이 이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을지도 모르죠.
넌 가엾은 아이야. 아무것도 잊을 수 없다는 게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너도 조만간 알게 될 거야.
그래도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당신은 알지 못하는 유령들이, 무수히 많은 다리들이 여기에 살고 있는 걸요. 그걸 모조리 죽일 수는 없어요.
그건 이미 죽어있는 거야. 유령은 죽어서 유령인 거란다. 그것보다,
여자의 주름은 시꺼먼 그늘 속에 숨어들어갔다. 사위는 온통 움푹 패여들어가 늘어진 어두운 주름뿐이었다.
넌 정말 많은 것들을 먹고 살아왔지. 그걸 다 기억하니.
응. 하루를 넘기기 시작한 이후로는 모든 걸 기억해요. 앉았던 자리도, 식사들의 내용도, 당신이 중얼거린 말들도, 당신이 잊어버린 말들도 전부.
그래. 그걸 도저히 기억할 수가 없어서 언젠가부터는 자기 살만 잘라 먹는 자들도 있단다. 기억해서 애도하지 않으면 죽여서도 먹어서도 안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당신은요?
난 잊었단다. 살기 위해 잊었고 잊어서 살고 있어.
무엇을?
늙은 여자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간혹 벌어지며 깊어지던 주름들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