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에 교살당한 어둠이 드러나는 날 사내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무덤가를 건넜다. 너를 보고 있었어. 노래를 불러야 할 입술이 여물기 전부터, 하나뿐인 음악이 시작되기 전부터. 빛의 언저리를 날벌레처럼 떠도는 하얀 먼지들이 제 자리를 찾아 가라앉기 전부터. 여자는 사내의 노래만을 듣고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깊은 밤이라 사내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밤보다 시꺼먼 개가 사내의 왼쪽 귓바퀴를 물어뜯었을 때에도 사내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여자도 사내도 보지 못한 사내의 잘려나간 귀는 시계태엽처럼 꺼끌꺼끌한 모양이었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추위에 얼어붙은 귀는 해가 분신하는 한여름의 하늘처럼 하얄 뿐이었다. 사내에겐 건반도 현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개화를 기다리는 푸른 입술들 뿐이었다. 노래가 시작되기 전부터 흐느끼고 있는 유령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런 것은 사내도 알지 못했다.
개는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미움받지도 사랑받지도 못한 채 사라져가는 맹인의 낮처럼 꺼져들어가는 무덤의 깊은 곳에서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잠깐, 잠깐만 이리로 와줘.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좀 전까지는 길에 있었잖아요.
그게 문제가 아니야. 이리 와. 나를 꺼내 줘.
여자는 박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흙의 갈라진 자리를 더듬으며 말했다.
대체 거기에는 어떻게 들어간 거예요? 그보다 선생님, 삽이 없어요.
그런 건 필요 없어.
그럼 어떻게 꺼내드리라고요.
여자는 흙의 틈새를 손톱으로 긁어내리며 비명을 질렀다. 부러진 손톱 사이에 축축한 흙에 젖어든 구더기가 반쯤 잘려나간 허리를 뒤틀며 꾸물거리고 있었다. 여자는 차마 죽어가는 구더기를 손으로 털어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부러진 손톱에 끼어든 구더기는 처형당한 머리를 구부린 채 온몸을 비틀어대고 있었다. 여자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그러자 콜록, 하는 마른 기침소리가 몇 차례 울려 퍼지더니 무덤의 틈새가 벌어졌다. 무덤 속에서 알 수 없는 액체에 흠뻑 젖은 박사가 튀어나왔다.
선생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여자가 흐느끼며 묻자, 사내는 시큼한 악취가 진동하는 머리칼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별일 아니야.
별일이 아니라뇨.
무덤 위를 걸어다니면서 이정도 일을 예측하지 못한 것도 아니야.
이 정도 일?
너도 조심해. 이름이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니까. 무덤은 이름 없는 유령들을 보면 삼키지 못해 안달이니 어딜 걸을 때나 틈새를 조심하란 말이야.
주의만으로 모든 재난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예측할 수도 대비할 수도 없었던 일, 일어나야만 했던 사건이 재난이기에. 한밤에 홀로 무덤가로 나선 여자가 수풀 사이에 가려진 틈새로 빠져들어간 것도 그러한 재난이었다. 축축한 땅굴 속에서 여자는 지난 날의 박사처럼 살려 달라고 수십 수백번의 비명을 내질렀으나 아무도 여자를 찾아 들어오지 않았다. 여자는 점점 더 깊은 늪 속으로 가라앉아갈 뿐이었다.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여자는 알지 못했다. 무덤가의 근처에는 마을이 있었고 그곳에는 이름조차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에도. 유령에게는 울음소리도 귀도 없다는 것을 여자는 잊었던 것이다. 속이 비어 신물밖에 올라오지 않을 때까지 내지른 소리를 들은 것은 여자 뿐이었다. 하물며 짐승조차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늪 속에서 부화를 기다리며 검고 축축한 세계를 만끽하던 구더기들만이 여자의 체취를 맡고 그녀에게 달겨들었다. 꿈에서 깨어날 때까지 여자는 제 몸의 모든 구멍을 손으로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거미가 아니었다. 구더기들은 그녀가 이해할 수도 없는 자리에 있던 틈새를 벌리고 그녀의 속으로 들어왔다. 사내를 구할 때처럼 무덤의 부푼 배 한가운데를 걷어차 보았지만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는 그제야 제게 다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에서 깨어날 때까지 그녀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더는 입을 벌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온몸이 아직 태어나지 못한 생으로 움틀거리는 끔찍스러운 감각을 만끽해야 했다. 깨어나고서도 여자는 제 속에서 무언가 그녀가 아닌 것들이 기어다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낳지도 뱉어내지도 못할 무언가가. 그녀에겐 다리들이 필요했다.
잠든 채 경련하며 땀을 흘리는 여자가 작은 벌레를 닮았다고 소리는 생각했다. 입 없이 하루를 끝맺는 하루살이와는 달리 괜스런 입을 달고 태어나 그 틈으로 무언가를 먹고 그만큼의 생을 거푸 살아야 하는 작은 벌레들. 여자는 헐떡이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작은 콧구멍만으로 가쁜 숨을 쉬었지만 숨 아래에서 파들거리는 입술은 언젠가 열릴 것이고 그녀는 삼켜낸 것만큼의 하루를 더 살아갈 것이다.
이젠 소용없어요.
소리는 다물어지는 틈새에 대고 속삭였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깊은 꿈을 꿀 수 없을 거예요. 꿈은 나날이 쪼그라들거예요. 나중에는 말라빠진 가죽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겠죠.
여자는 대답 없이 소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너를 처음 보는 것처럼. 네 이름을 부르지 않고, 네 이름조차 묻지 않고. 그녀는 무덤을 받아들이듯 네 말을 받아들였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물음도 없이.
우린 무덤에서 탈출했어요. 유령들의 마을에서 내쫓긴 거예요. 아마 살아서 다시 돌아갈 일은 없겠죠.
이미 여자의 몸보다 작아진 틈새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평생 그녀를 가두던 그녀의 몸, 검은 흙뿐이던 몸이 더 이상 무덤이 아니라면 그녀는 무엇을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런 건 나도 몰라요. 내 처지도 당신과 마찬가지인 걸요. 이곳은 도시를 닮은 미로이지 도시는 아니니까요. 우린 도시와 도시를 여행하면서 모든 대도시를 함께 걷고 사는 도시의 시민들이 아니니까요, 우리는 그저 하나의 방과 방을 엿보면서 떠돌아다닐 뿐이죠. 그건 우리의 방도 아닌데. 훔치지도 빼앗지도 못할 방들을 기웃거리면서.
그 앨 보고 왔니?
유리는 오늘도 유리였어요. 그 애의 이름을 묻고 오는 길이에요.
벌어진 입들이 허공을 맴돌며 흩어지고 있었다. 음성을 싣지 못한 마지막 물거품들처럼. 기억의 방들에는 법칙이 없었다. 기억에는 순서가 없었다. 시간에는 공간이 없었다. 공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살이 맞붙어버린 순간들, 공간의 속에서 상처가 여물어 떼어낼 수 없게 되어버린 추억들은 버려진 방들에 얼룩진 채 남아 있을 뿐이다. 너희는 두 번 다시 잃어버린 방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임에도, 그곳에는 네가 불렀던 이름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영영 발견되지 않을 흔적이.
우린 너덜너덜한 모서리 위에서 계속 춤을 출 거예요.
소리는 늙은 여자의 어깨에 왼쪽 귀를 기대며 칭얼거렸다. 오늘은 당신이 이야기를 들려줘요. 당신이 읽었다는 책 말이에요.
늙어가는 사람 특유의 짙고 가냘픈 체취가 그녀의 숨결에서 배어 나왔다. 군데군데 옅은 공기구멍이 뚫린 여린 피부 사이에서 창백한 육체에 내부에 냉장된 채 서서히 부패해가는 내장의-살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여자는 관념적인 철학서를 소리내어 읽는 학생처럼 단조로운, 그러나 씻어낼 수 없는 깊은 우수가 배어든 듯한 어투로 말했다.
요즈음에는 미술가에 관한 글을 읽고 있었어. 아마 너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일 거야. 그는 말년에 거친 콘크리트로 사면이 막혀 있는 좁은 가건물에 유폐되었어. 치매에 걸려 일생의 업적과 자아를 잃어버린 그는 저만의 감실 속에서 아무도 상찬하지 않는 그림을 그렸지. 그는 거친 벽의 살점에 문신을 하듯 벗겨낼 수 없는, 마치 지옥도와 같은 그림들을 그렸지. 후세인들은 그의 시체와 함께 검붉은 회반죽으로 범벅이 된 벽들을 발견했고 그 벽을 모조리 뜯어 박물관에 전시해 놓았지. 그는 은밀한 지옥의 살점마저도 빼앗기고 만거야.
소리는 여자의 옆얼굴을, 어둠에 가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 뜨끈한 숨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어느 틈에 이렇게나 늙은 것일까? 그녀는 여지껏 대체 무엇을 견디고 있는 것일까? 서재에 틀어박히고 난 뒤부터 그녀가 두 다리를 사용하는 모습을 소리는 거의 보지 못했다. 그녀는 두 다리를 오로지 책을 읽는 데에만, 이야기속에서의 산보를 원활하게 이어나가기 위한 용도로만 쓰는 것 같았다.
늙은 여자는 그녀의 허공을 헤집으며 읽어내렸던 무수한 목소리들 중 가장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두 노파가 서로를 위로하며 거대한 케이크를 만드는 사건이었다고 이야기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들이 만든 케이크가 일주일 내내 팔리지 않아 노파들이 주말마다 퍽퍽하게 변해버린 케이크를 서로의 입속에서 녹이면서 한 주를 끝마쳤다는 일종의 의식을 수행했다는 대목이 그녀를 매혹시켰다고 했다. 그녀는 스스로도 그런 이야기를 좋아했던 이유는 모르겠지만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고 덧붙였다.
당신이 왜 노파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요. 그녀들이 유령이기 때문이죠.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 친구들의 케이크가 한 번도 팔리지 않았던 걸지도 몰라. 자, 이런 구절이 있어. 노파들의 차고 달콤한 케이크를 맛본 이들은 세상에 단 세 명뿐이었다. 두 명의 노파 본인들과 그들이 휴가를 가기 위해 잠시 고용했던 종업원. 사실 종업원이 케이크를 맛보았다는 추측은 거짓일지도 모른다. 노파들은 휴가를 가기 전에 남은 케이크를 종업원에게 선물했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받은 종업원이 곧장 길가에 있는 쓰레기통에 거대한 케이크를 조각조각 분해하여 쓸어담았는지, 그것을 조금씩 녹여내어 변기통에 흘려보냈는지, 밤길을 헤매던 굶주린 개에게 먹잇감으로 주었는지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휴가에서 돌아온 뒤 노파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종업원의 표정을 살피었지만 종업원은 쉬폰케이크에 대한 일은 모두 잊어버린 듯 아무런 대답도-케이크를 잘 먹었다는 의례적인 인사치레조차-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들은 죽기 직전까지의 고흐와 마찬가지의 삶을 살았던 거야. 매주 케이크를 구워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나서 계속해서 케이크를 만들어냈지만 단 한 명의 열성적인, 혹은 건성적인 손님도 찾지 못했던 거지. 고흐가 자신의 사랑하는 동생 테오에게만 그림을 팔 수 있었던 것처럼, 그가 식사를 하듯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려낸 노란색 해바라기와 검푸른 하늘, 광증을 지표하는 흔적들을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녀들과 고흐가 달랐던 점이라면, 고흐는 계속해서 그의 광증과 불안, 고독에 대한 글을 남겼고 그녀들은 문맹이었다는 점 뿐이겠지. 그녀들이 중얼거린 시들, 글자를 입지 못한 혼잣말들은 순식간에 증발되어 얼룩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고흐의 붓질, 그가 평생을 거쳐 남기기 위해서 허덕였던 모든 몸짓들은 그의 편지들과 캔버스, 귓바퀴가 잘려나간 귀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노파들은 죽음조차 남기지 못하고 흙 속에 묻히고 말았다는 걸, 그녀들의 박살난 두개골에서 빠진 뼛조각만이 그녀들의 불운을 기록하고 있었다는 걸, 다만 그녀들의 숱한 불행을 예술이라고 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걸, 그녀들의 케이크 맛을 뒤늦게 상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걸, 그녀들이 최후의 날 만들었던 케이크는 모두 그녀들의 입속으로, 사실 케이크를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녀들이 힘겹게 꾸역꾸역 밀어넣었던 그녀들의 자그마한 위속에서 흙과 함께 썩어버렸다는 걸, 당신은 아직 이야기해주지 않았어요.
그래도 너는 알고 있잖니. 너도 나랑 같은 책을 읽었었나?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당신이 내게 책을 읽어주지 않는 이상 난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당신이 읽은 책의 내용을, 노파들의 최후를 알 수 없는 걸요.
그렇겠지. 그래도 난 네 목소리를 들어. 네가 없을 때에도.
날 원망하나요? 내가 당신을 듣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니. 날 듣지 않는 사람들을 일일이 저주하기에 나는 너무 지쳤어.
노파들처럼?
그래. 그녀들이 꺽꺽 흐느끼며 그녀들이 만든 하얗고 달콤한 케이크를 목구멍 속으로 밀어넣던 노파들처럼. 평생 도래하지 않을 영광을 저 스스로 찔러 죽이듯 가늘고 날카로운 포크를 식도에 찔러넣던 노파들처럼.
그녀들은 유령이에요. 유령은 자신을 살해할 수 없는 걸.
그래도 자해는 할 수 있단다. 피 흘리지 않고도 출혈하는 방법이 있다는 걸 넌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나도 운 적이 있어요.
눈물 없이도?
그럼요. 지금도 울고 있는걸. 기침을 하지 않았는데도 목 안쪽이 아파요. 숨이 막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슬픔이 느껴지는 부위를 공유한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같은 슬픔을 공유하는 건 아니지. 노파들의 이웃들도 목구멍 안쪽에서 슬픔을 느꼈겠지만, 그들은 한 번도 노파들의 불운에 울어준 적이 없었으니까. 노파들이 죽었을 때조차 그녀들의 케이크가 아닌 그녀들의 썩은 육체에 대고, 그녀들의 비어버린 마음에 대고 울었을 뿐이었지. 그런 건 그녀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당신, 거짓말을 하고 있군요. 노파들은 아직 죽지 않았어요. 그렇죠? 그녀들처럼 슬픈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죽었다니, 믿을 수 없어요.
그래. 난 상상 속에서 노파들을 살해하기 위해, 그들에게 끝을 선사하기 위해, 매주 케이크를 만들고 업보와 같은 작품을 스스로 죽여 입 안에 찔러넣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봤어. 뱃속에 가득찬 케이크가 소화불량을 일으켜 심장마비로 둘이 한날 한시에 사망하는 상상, 가보로 간직되어온 아름다운 권총으로, 살상용이라기보다는 순전히 장식용인 것처럼 보이는, 휘황찬란한 은색 장식이 도드라진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하는 상상,-그들의 죽음은 항상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머리를 꼭 맞붙이고 한 사람의 관자놀이에 총을 대어 총알이 발사되면 맞붙은 두 개의 머리를 한 번에 관통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지 (왜 둘이 한 번에 죽어야 하죠?) (만에 하나 한 사람이 죽고 다른 사람이 삶으로 이끌려오게 되면, 그래서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시간을 끌게 되면 그녀는 그녀가 만든 케이크를 홀로 먹어치워야했기 때문이야, 노파 한 명에게 죄의 무게를, 숙명의 무게를 모두 짊어지우고 싶지 않았어.)- 한날 한시에 얼음장 같이 차가운, 그러나 밑바닥까지 얼어붙지는 않은 겨울 호수에 몸을 던져 익사하는 상상, 그녀들이 추락하며 붙들고 내려온 포플러 뿌리가 얼지 않고 거꾸로 뒤집어진 채 허우적거리며 공중으로, 뿌리칠 수도 뿌리를 내릴 수도 없는 허공으로 아름답고 가녀린 팔을 뻗는 상상까지 해 보았지만 모두 소용 없었어. 난 도저히 그녀들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으니까. 죽음의 의례를 마친 그녀들은 다시 갈빛의 아늑하고 지긋지긋한 주방으로 되돌아와 하얀 케이크를 굽곤 했지.
불공평해요. 어째서 삶에 속한 사람들은 일찍 죽고 우리 같은 유령들은 삶의 언저리에서 떠도는지.
너는 우리가 죽음에 속해 있다고 생각해? 늙은 여자는 은밀한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뜨거운 숨이 소리의 코를 적셨다.
난 지금 이 자리에서 아흔 아홉 명의 죽음을 지어낼 수 있어. 그렇지만 그 아흔 아홉 명중에 나는 없겠지. 죽음에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들은 유령이 아니야. 저승에도 이승에도 발 붙일 곳이 없어서 떠도는 것들이 귀신이지. 봐. 아무도 우리를 쫓아오지 않잖아? 다만 우리를 쫓아내려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지. 이승에서 쫓겨나도, 저승에서 쫓겨나도 우리에겐 갈 곳이 없어. 우리는 그저 어스름에, 낮도 밤도 아닌 시간에 망령으로 떠돌 뿐이야.
죽음의 개념도 떠올려 볼 수 없다고요? 그냥 상상하는 것도 안된다고요? 난 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은데.
아무도 우리의 죽음에 대해 논하지 않아. 그건 불가능할뿐더러 무가치한 일이기까지 하니까.
늙은 여자는 시계를 확인하며 물었다. 소리, 너는 시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니? 끊임없이 증폭되는 현재가 아니라, 어떠한 공간을 점유하는, 그래 마치 자로 잰 것만 같이 정확한 각도의 순간에 대해. 바깥의 사람들은 시계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진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고 해. 난 그들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지. 각각의 기계장치가 지시하는 각도는 모두 달랐으며, 그들이 어떠한 시점을 같은 시간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것들이 산재해 있는 무수한 거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고 말이야. 그래서 난 너희에게 시계의 존재에 대해 구태여 알려주지 않았던 거야. 그런데 요즈음엔 우리도 별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해가 지고 어둠이 떠오르는 일, 빛에 가려졌던 침묵이 제 몸을 펼치는 모양을 바라보면서 하루의 끝을 가늠하는 일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들여다보면서 시간을 셈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시간과 공간은 같은 개념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너는 하루를 건너는 동안 하나의 방을 건너가고 있었는지도 몰라. 우리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방들을 횡단하고 있는지도 몰라. 문도 시계도 없이. 어쩌면 하늘도 우리에겐 필요 없을지도 몰라. 여자는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소리의 귓가에서 여자는 사실 지금까지 한 권의 책도 완독하지 못했다는 것, 날마다 펼쳐드는 책의 질감과 무게를 도저히 기억할 수 없었다는 것, 어쩌면 그녀는 일생 하나의 책도 끝까지 읽을 수 없도록 설계되었는지도 모른다는 것, 그건 책을 읽으려 하는 모든 이들에게 마찬가지로 주어진 운명인지도 모른다는 것, 특히 책의 후반부를 펼쳐들수록 그녀가 책을 넘기는 속도는 스스로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더뎌진다는 것, 그럼에도 그녀는 함부로 책장을 넘길 수가 없다는 것, 그녀가 상상한 무수한 결말 중에 하나의 결말에 책은 반드시 도달한다는 것을 그녀는 견딜수가 없다는 것, 그녀가 책장을 넘기는 행위가 무수한 결말의 가능성들을 살해하는 일인것마냥 느껴진다는 것, 사실 그녀는 이미 확정지어진 책에 어느 부분에도 영향을 끼칠 수 없음에도 마치 바라보는 것만으로 고양이가 죽어버리거나 살게 된다고 믿는 양자역학자들의 이론만큼이나 불가해한 예감으로 그녀는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소리는 잠에겨워 몽롱해진 정신으로, 마치 꿈 속으로 들어가는 문턱에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흑백의 향을 맡듯 고분고분한 태도로 듣고 있었다.
여자가 사라진 자리에서, 아니, 어쩌면 여자가 평생 다다르지 못할 공간에서 유리가 네게 손을 내밀었다. 네가 준 책, 다 읽었어.
다른 건 없냐고 묻는듯한 말투였다. 너는 어제 유리가 하루를 마치고 죽어가는 동안 여자의 곁에서 쓴 글을 내밀었다. 어제의 유리에게 건네는 편지였다. 오늘의 유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다만 수취인의 이름만이 같은 대상에게 향한다는 점 이외에는 정말 “너”와는 아무런 접점도 없을.
유리는 말 없이 네 곁에서 편지를 읽었다. 부끄러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 편지는 더 이상 너희와 관련이 없는 물질이었다. 연이 끊긴 대상은 네게 수치도 자부심도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너는 진창에 빠져 눈 앞에 보이는 흙벽만을 더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는 다가오는 것과 멀어지는 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기억과 현재를, 추억과 미래를, 꿈과 현실을 양단할 수 없었다. 어쩌면 처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처음인지도 몰랐다. 유리도, 방도, 책도, 꿈도, 하루도,
넌 내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니?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도 네게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그들에게 대답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먼저 네 부름을 구하지 않았다.
난, 어쩌면 어제가 아니라 내일에서 왔는지도 몰라.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모를 먼지가 하얀 눈송이처럼 너희의 시선 위를 맴돌고 있었다. 가슴팍을 띄우며 발길질을 하는 갓난쟁이의 춤처럼 부질없이 흩날리는 움직임. 닳아 해진 찌꺼기들에는 효용이 없었고 목적도 회한도 없었다. 그저 여남은 수명을 몸부림치는 숱한 현상들. 두고 온 어제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희는 알지 못했다. 한 번 살아 나온 방에 다시 들어갈 일은 없었으므로. 하루를 마치고 죽어버린 유리의 방들이 어떤 모양으로 변해가는지 죽어버린 하루에도 허물처럼 여남은 생은 몸의 형태를 하고 누워 있는지. 두 개의 다리는 어떤 방향으로 기어가고 있는지. 너는 유리가 두고 온 수백 쌍의 다리들을 떠올렸다. 그걸 끌어안고 헤엄쳤더라면 여자는 늪 깊은 곳, 꿈으로부터 벗어난 밑바닥에서 깨어나지 않아도 좋았을까. 반 뼘 위의 어스름한 하늘 위에서 발버둥치며 그래도 살아야지, 살아야지, 다짐하던 여자의 춤은 그녀를 어디로 데려다주었을까.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래. 알고 있어.
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너를 쳐다보았다. 유리는 갈수록 말수가 줄어갔다. 자그마한 입은 함몰되어 가고 있었다. 언제라도 사라질 것처럼.
얼음사막을 기억해?
대답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곳은 꿈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사람만, 어둠의 오돌토돌한 경계를 확인하고만 이만 기억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살만큼이나 많은 입들이 있었고 구멍만큼이나 많은 말들이 있었다. 이제야 너는 바깥의 사람들이 모두 유리였던 까닭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뱀의 아가리 속에서 시꺼멓게 울고 있던 쥐들의 이빨엔 갉힌 흠이 나 있었다. 살기 위해 주둥이 밖으로 나가려고 꿈틀거리는 비명들의 몸짓이 징그럽고 부러웠다. 천장에 매달린 여자는 하루를 내달려도 네게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수천 명의 유리에게 물어도 정답을 듣지 못할 것이다. 세상은 어지럽고 혼란했으며 텅 비어 있었다. 날은 여지없이 저물고 있었다. 유리는 얼마 남지 않은 하루를 시덥잖은 문답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유리와 떨어져 지내는 날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네가 아는 유리들보다 네가 모르는 유리들이 더 많아질지도 몰랐다. 방 안쪽에는 문이 없었고 바닥에는 틈이 없었음에도 너는 흩어진 흰 눈 안쪽에 틈새가 있지 않을까 더듬대고 있을 뿐이었다. 네가 알지 못하는 유리들을 다시 만나볼 기회는 없었다. 네가 아는 유리들을 다시 만져볼 기회는 없었다. 네가 부르지 못한 이름도 유리인지 확인해 볼 기회도 영영 없을 것이다. 박사가 심어놓은 칩에 자폭장치가 있었더라면 너는 바로 오늘, 이 방안에서 그걸 터뜨렸을 것이다. 허공에 매달려 있던 밤이 마침내 발밑까지 늘어뜨려져 비참한 최후를 맞는 순간, 그에 맞추어 닫히는 유리의 눈꺼풀과 함께. 결국 어떠한 비밀도 풀어내지 못하고.
그렇지만 너희에게는 어떠한 신비도 없었기에 그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눈을 감았다 뜰 뿐이었다. 아침도 밤도 그리 멀지 않았다. 여전히 두 개의 다리가 기억의 아래 매달려 있었다. 기지도 걷지도 않는 두 개의 다리가. 사라지지도 버려지지도 재생되지도 않는 방들처럼.
하루살이들의 마지막 밤에 너는 유언이 될 글을 쓰기 위해 펜을 들었다. 오랜 겨울밤 내내 잠들어 굳어버린 잉크에선 아무런 울음도 흐르지 않았고 너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울음을 무참한 속에 가둬 두었다. 흐느낄 때마다 살갗의 얇은 판이 울리며 깨어질 듯 연약한 속에서 밤처럼 새까만 잉크가 흘러넘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