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하루살이들 서문

모든 이야기는 네가 시작한 것이다. 굳이 숨을 쉬지 않아도 욕망하지 않아도 움켜쥐지 않아도. 제 밑을 찢어내며 같은 겨울을 맴도는 열차에는 누구도 막아낼 수 없는 창문들이 돋아나 있어. 죽음에는 등도 뼈도 없는데 등이 굽은 방랑자를 보고 헤어지지 못한 귀신의 얼굴을 떠올린 사냥꾼은 무엇을 쫓고 있었던 것일까. 창에는 내부도 외부도 없다. 그저 너머와 너머 서로의 금과 금의 바깥이 있을 뿐이다. 네가 망가뜨린 시간에는 계절도 날짜도 없다. 회고의 날들을 추억하는 시인에겐 고향이 없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접점이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접붙일 수 없는 말들을 억지로 엮어가며 시를 낳는 것은 아니다. 묽은 체액을 먹고 짙은 먹빛으로 번져가는 말들을 읽고 우리는 자란다. 우리는 우리가 마실 수 없는 피를 마시고 자란다. 우리는 우리가 부를 수 없는 이름을 삼키며 자란다. 말을 살찌우는 것이 논리가 아니듯 시를 살찌우는 것이 언어는 아니다. 향기롭기보다는 비극적인 추억을, 비극적인 추억보다는 도착적인 시간을 원할 때가 있다. 향기롭지도 비극적이지도 도착적이지도 않은 시간을 쓰는 삶도 어딘가엔 있을 것이다. 어휘 없이 모든 것을 부르는 시간도 있었지만 그러한 순간들은 인화지 없이 찍어낸 사진과 같아서 기록될 미각도 시각도 청각도 후각도 어떠한 감각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애써 그러모은 빛의 얼룩을 순식간에 상실한 채 사라지고 만다. 이것은 필름 없이 빛만으로 찍은 사진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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