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하얗고 불가해한 밀실 안에 갇혀 칙사의 열띤 연설을 듣고 있는 이 순간 역시도 생애 내도록 반복되어온 기호 중 하나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와 같이 이곳까지 밀려온 이들, 나체도 양복도 아닌, 자연도 비자연도 아닌 옷을 입고 있는 이들, 자연의 얼룩을 위장한 옷을, 자연스럽지 않은 자연의 피부를 걸치고 있는 이들도 사내와 같은 종류의 기호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사내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새하얀 벽과 새하얀 나신, 새하얀 태양과 새하얀 전구는 모두 기표만 다른 동음이의어들이었다. 그럼에도 몇몇 이들은 칙사의 숨가쁜 연설에 매혹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몇몇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자뭇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칙사의 말을 듣던 이들 역시 운명이 내미는 부드러운 손짓에 홀려 언제나와 같은 실패가 예정되어 있을 깊다란 심연으로 스스럼없이 들어갔다. 그들은 칙사가 내미는 서류를 홀린 듯 받아들였다.
그들의 밑바닥을 쥐새끼처럼 갉아먹을 수술대에 올라 눈을 감고 그들의 수열을 추출하는 작업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사내의 예상과는 달리 메스도 피도 엄숙함도 없었다. 농부 출신이라던 남자가 주근깨투성이의 얼굴을 칙사에게 들이밀며 계집들이 껌뻑 죽는 몸으로 바꿔달라고 속삭일 때 칙사는 터무니없는 요구에도 부드럽게 웃으며 그래요, 하며 새까맣고 맨들맨들한 면류관과 같은 고리를 농부의 이마에 씌울 뿐이었다. 새하얀 수술대는 농부의 덩치에는 비좁아 어깨가 튀어나오고 발이 삐져나왔지만 그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칙사의 지시에 따라 얌전히 눈을 감았다. 눈부신 백열등이 그의 감은 눈꺼풀을 부드럽게 애무하고 있었다.
곧 일 분도 지나지 않아 고리에 파란 불빛이 들어왔고 작업이 끝났다는 낭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칙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끝났다고, 여성의 기계적인 말을 한 번 더 선언하는 것으로 작업은 정말 끝난 듯했다. 농부는 얼떨떨한 얼굴이었지만 칙사는 코드를 추출했으니 나머지 작업은 언제라도 할 수 있다고,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수열을 알아내는 것뿐이며 그 수열에 다른 수를 삽입하여 변형시키고 적절한 부분만 추출하여 덜어내는 일은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비좁은 수술대에 거부감을 가졌던 이들 여럿이 너나 할 것 없이 칙사의 앞에 줄을 섰다. 칙사는 훌륭한 공연을 선보인 마술사가 관객들로부터 팁을 받듯 그들의 서명을 받아들였다. 사내는 앞다투어 줄을 서는 이들에게 밀려 함께 줄을 서고 얼떨결에 서류를 받아들었다. 칙사는 그들 전부가 수술에 동의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사내는 대충 서류에 적힌 내용이라도 읽어보자는 생각에 펜과 서류를 모두 받아들였다. 펜은 거절하려 했으나 펜 말고 서류만 달라는 말을 어떻게 칙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여 그가 건네는 대로 전부 받아들였다. 서류의 내용을 읽어보면 칙사가 설명했던 불가해한 말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갑작스레 눈물이 차올라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연구소의 건조한 공기 때문에 흐르는 것인지, 무언가를 직감한 몸이 치밀어오는 절망을 이기지 못해 배설해내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눈꺼풀이 끔찍하게 근지러웠으나 손을 들어 눈을 비빌 수는 없었다. 그러면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눈치챌 것이다. 이곳의 건조하고 뜨뜻한 공기에 그만이 적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또 그만이 무참하게 벌거벗고 있음을, 환희에 달뜬 백색 밀실 속에서 오로지 그만이 불안을 못이기고 절망하고 있음을 들키고 말 것이다.
부옇게 흐려져 제대로 읽을 수조차 없는 서류의 내용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사내는 눈치를 보았으나 그의 뒤쪽에 서있던 여군이 벌써 한 페이지 분량의 서류를 다 읽어내리고 다 읽었어요? 하며 하나 남은 펜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사내를 재촉하자 사내는 차마 아직까지 첫 문장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알 수 없는 조급함에 쫓기며 서명을 한 뒤 여자의 검고 부드러운 손에 펜을 넘겨주었다.
누군가 눈 속에 꺼끌꺼끌한 모래를 쏟아부은 것처럼 간지러웠다. 그의 동공이 시각 중추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촉각의 중추로 뒤바뀌어버린 것 같았다. 차라리 미친 듯이 눈을 비벼 부드러운 눈과 그 속에 들어차 있는 왜곡된 영상들을 모조리 잉깔라버리고 싶은 욕망과 싸우고 있을 때 칙사가 그의 어깨를 치며 수술대로 올라가라고 눈짓하였다.
사내는 오로지 눈을 깜빡거려 눈물을 쏟아내지 않기 위해 눈꺼풀에 힘을 주는 일에만 집중하며 앞으로 비틀비틀 걸어가 수술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는 정갈한 수술대와 그의 누추한 육신이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수술대 위의 우산과 재봉틀처럼, 봉긋한 하얀 꽃망울 대신 촉촉한 분홍색 혓바닥을 낼름 내어보이는 사막의 선인장처럼. 아지랑이와 같이 일렁거리는 하얀 빛무리가 와락 끼쳐들어왔고 상처받은 눈의 피막에 보랏빛의 멍자욱이 번져갔다. 자, 눈을 감으세요, 하는 말을 듣고서 한참을 멍하게 눈을 끔뻑거리던 사내는 그가 더 이상 울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서야 그에게 흘러들었던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서 얌전히 눈을 감았다.
보랏빛 얼룩들이 지하의 달들처럼, 익사한 여인의 풀어헤친 머리칼처럼 떠올랐다. 그 얼룩이 그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절망적으로 찍, 찍찍거리는 쥐의 정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곧장 사그라들었다. 그는 어떻게 면류관과 같은 기계가 그 자신도 모르는 그의 본질-수열을 읽어내고 훔쳐가는지도, 모든 작업이 어떻게 끝나고 잠이 든 건지도 알지 못한 채 가만히 누워 그의 세계를 둥둥 떠다니는 보라색 달들을 지켜보며 모든 것이 꿈이 아닌지 그렇다면 어디부터가 꿈인 것인지 예기치 못한 순간이 한 번도 그에게 찾아오지 않았고 한 번도 그를 방문하지 않을 것임을 통렬하게 깨닫던 그 텅 빈 무대에서부터 모든 일이 다시 시작되는 것인지, 다시 깨어나면 이번에는 버스에 타지 않고 무슨 일을 하면 좋을지, 결국 그는 울렁거리는 버스에 실려 멀미를 하며 환각과 싸울 수밖에 없는지, 아니, 설령 거리를 쥐새끼처럼 배회하면서 빌어먹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다시는 버스에 타지 않을 것이고 다시는 살해당하지 않을 것이며 빌어먹을 총을,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도 결코 발사되지 않을 총을, 그의 연극이 실패이며 결국 그의 삶은 연극도 무엇도 아니라는 것을 절망적으로 알려줄 불발의 총을 애걸하지 않을 것이라고, 차라리 정신병동에 들어가 광기의 탑을 쌓을 것이라고, 수녀복처럼 길고 단정한 옷을 입고 있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가슴을 부여잡고 아랫도리를 들추고 겁간하고 겁간당하고 그들의 부드럽고 얄팍한 배를 마음껏 짓밟을 것이라고, 그들이 지껄이는 알 수 없는 소리, 그러나 그가 알아야만 했던 소리를 마음껏 비웃으며 발바닥 아래에서부터 치밀고 올라오는 황홀경을 만끽할 것이라고, 마주치는 누구의 배라도 전부 밟고 다닐 것이라고, 그의 발 아래에서 사내와 여자와 노인과 아이와 임부와 개와 쥐와 바퀴벌레가 뭉그러지는 감각을 그 평등하고 부도덕한 감각을 마음껏 느끼며 돌아다닐 것이라고, 방탕주의자들의 해변에 찾아가 그를 깡그리 무시했던 이들이 기겁하며 그의 발 아래에서 뭉근한 촉감으로 해체되는 감각을, 그의 심연보다 낮은 곳에서 허우적거리는 감각을 만끽할 거라고, 그러다 경찰이 그를 연행하면 경찰의 배를 밟고 판사의 배를 밟고 간수들의 배를 밟고 빌어먹을 사형대의 배를 밟고 모든 것을 끝낼 것이라고 생각하며 서서히 눈을 떴다.
하얗고 치명적인 빛이 독처럼 밀려들며 다시 그의 시야를 일그러뜨리자 고통과도 같은 감각이 서서히 깨어났다. 사내는 자신이 끈적하고 따뜻한 양수와 같은 물속에 잠겨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작고 동그란 기포들이 그의 턱을 간지럽히며 날아올라 사라졌다. 숨을 들이쉴 때는 투명한 공기 속 점성 높은 액체가 흘러들었으나 어쩐 일인지 폐에 물이 차오르는 이들이 마땅히 앓아야 하는 날카로운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관짝을 열어 놓아야 해, 누구도 죽음이 남기고 간 껍데기를 숨길 수 없게, 숫자, 숫자 말이에요 일더하기일은이이더하기이는사사더하하기더하기더하기 저 빌어먹을 모래조차도 내 좆을 품어주지 않겠지 관짝 관짝을 열어놓아야 해 죽음의 순간 발기한 좆을 누구라도 볼 수 있게 동공이 좁혀지고 잔혹한 백색 빛에 익숙해지고 나자 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는 검은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래도록 거울을 보지 않고 살아왔지만 저 볼품없는 얼굴과 흐려빠진 눈빛이 사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내가 끈적하고 부드러운 양수에 붙들린 손을 허우적거리며 관짝과도 같은 투명한 유리문을 열어젖히고 몸을 일으킬 때에도 검은 눈은 미동도 없이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파충류처럼 깊게 주름진 목을 움켜쥐고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몸을 밀어뜨렸다. 아무런 소리도 냄새도 배경도 형상도 아플라도 사물도 주변도 언어도 심지어는 침묵마저도 없었다. 오직 사내와 그의 거울상뿐이었다. 아니, 오직 사내의 거울상과 사내뿐이었다. 사내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검은 눈만을 깜빡거리고 있는 서글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것이 그의 예기치 못한 순간일까? 아니었다. 사내는 이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끝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님을. 사내는 부조리한 방식으로 마주한 동음의 기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는 분열된 공모자를 환멸에 섞인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처형을 집행하기 위해 목을 졸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는 추방당한 것이 그가 아닌 자신임을 깨달았다. 끝이 예견된 육체, 간절히 갈망하던 죽음이 도래한 육체를 사내는 느낄 수 없었다. 그의 가느다란 팔뚝에 새파란 혈류가 불거져나왔으나 목을 옥죄어오는 고통도 밀어닥치는 현기증도 그의 내부에는 없었다. 죽음은 언제나 그의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욕망은 내부에, 죽음은 외부에 결코 뭉그러뜨릴 수 없는 투명하고 단단한 벽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었다. 사내의 검은 눈에서 뜨뜻한 눈물이 흘러내렸으나 그것은 사내의 눈물일 수 없었다. 관짝을 열어놓아야 해, 누구도 죽음이 남기고 간 껍데기를 숨길 수 없게 제 것이 아닌 열락과 제 것이 아닌 죽음은 어째서 그토록 쉬운 것인지, 사내는 축 늘어져 오줌과 설사를 흘리는 시신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오물의 역겨우리만치 달콤한 냄새가 진동하고 경악에 찬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 사내는 헐벗은 얼굴과 몸뚱이를 견디지 못하고 거울을 깨뜨리고 있는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복제된 몸과 복제한 몸 중 하나는 살아남았으며 비명을 지르는 자들은 모두 남겨진 이들이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자들이 어디에선가 달려나와 저 자신을 살해했다는 충격에, 그럼에도 아직도 아직까지도 살아남아 지독한 절망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좌절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그들을 끌어안으며 달래었다. 그들은 누군가가 그들의 아래에서 죽어버렸다는, 언제나 누군가는 죽어가지만 자신만은 언제나 살아남는다는, 이러한 부당한 상황이 그들의 생애 내내 계속되리라는 절망적인 깨달음을 곱씹으며 하얀 가운을 걸친 유령들이 주사해주는 안정제에 취하여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그들이 경험한 최초의 죽음이었으며 최초의 살해이기도 했다. 칙사는 그들을 달래며 이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낡은 집을 버리고 이사를 갈 때에는 벌레먹은 집을 모조리 태워버리고 미련을 남겨두지 않은 채 떠나가듯이 그들은 좀먹고 냄새나는 몸을 완전히 내던지고 떠나가는 의식을 치른 것뿐이라고 뱀처럼 쉭쉭거리는 소리로 속살거렸다.
내가 거짓말을 한 걸까 봐 두려운 거라면 그런 걱정 따위는 접어둬요. 당신들의 수열은 모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으니까. 원한다면 언제든지 새로운 몸을, 의식을 복구해낼 수 있어요. 당신들이 원한다면 다리나 눈, 팔과 심장을 따로 분리해서 만들어낼 수도 있죠. 그러니까 걱정 말고 다녀와요. 돌이킬 수 없는 불구가 된다고 해도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다시 복구시켜드릴 수 있으니까요.
그들은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고 헛구역질을 하지도 발작과도 같은 자해를 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누구였는지 그들이 누구일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칙사의 어설픈 연설에 동화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정체에 대해 고민할수록 절망적인 멀미만 심해져갈 뿐이었다. 사내는 제 사타구니 아래로 시꺼먼 피가 뒤섞인 오줌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끊임없이 출렁거리며 부풀어가는 오물을 그는 더 이상 갈무리할 수 없었다. 그의 허벅지 사이에서 부패해가는 성기-배설구가 하혈하는 모습을 모호한 언어의 형태로만 도사리고 있던 비광학적 세계와 처음으로 마주한 놀라움으로 잔뜩 확장된 죽은 눈들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칙사의 배웅을 받고 얌전히 방주에 올라타 지독한 울렁거림 속에 몸을 내맡긴 채 검고 아득한 심연을 건너 붉은 대기 속으로 떨어져내렸다. 우주는 한없는 침묵이었으나 그들에게는 닿지 않는 것이었다. 매혹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간 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사내는 보지 못하였다. 붉은 머리의 소년을 본 기억이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사내가 물어본 이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우주선의 내부는 치명적인 공백 상태였다. 군인들은 어항 속을 세계로 여기고 살아가는 금붕어처럼 입술을 빠끔거리며 낯선 대기에 적응하려 애썼다. 입 속에는 작고 미세한 기포들이 흘러들었으나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구에서 그들의 주위를 떠돌던 투명한 허공을 없는 것이라고 여겼듯.
붉은 머리의 소년은 엘리베이터 문처럼 생긴 해치 바로 옆에 앉아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소리 없는 인사였다. 오른손을 펼쳐보이며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그들은 붉은 머리의 소년이 언제부터 그들과 함께였는지 고민했다. 우주선 내부는 첫 번째 사람이 가족의 화합을 깨는 달그락소리와도 같이, 새장 속의 공백을 망가뜨리는 찍찍거림과도 같이 불온한 음성을 내뱉는 순간, 자신이 침묵에 안착하지 못한 부적응자임을 스스로 알리는 소리, 다들 식사는 했어, 혹은 가족들은 잘 있을까, 무섭지는 않아, 같은 하잘것없는 소리, 스스로를 바보로 만드는 소리, 백치들을 백치가 아닌 자로 승격시키는 소리,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소리, 우주에는 어떠한 소리도 없다는 사실을, 끝없는 공백에는 소음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부적응자의 소리, 갖가지 쓸데없는 소리 속에서 안락하며 쓸모없는 생을 보냈다는 사실을 누설하는 소리, 그들은 그런 소리에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가장 처음 출현하는 주인에게 자신을 종속시키는 소녀처럼, 어둠 속에 감금된 소녀처럼 그들은 날과 날의 경계조차 구분할 수 없는 긴 하루에 갑작스럽게 쏟아져내린 균열과도 같은 소리에 맞추어 하루-라고 추정되는 시간-을 견뎌내고는 했다. 그러니 오늘 그들의 머릿속에서 철지난 커피광고 멜로디와 같이 울리게 될 소리는 그 애 알아, 정도가 될 것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하잘 것 없는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으나 벙어리처럼 고개를 젓는 사람들, 검고 흰, 검거나 흰,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얼굴들이 술렁거리는 갈대들처럼 고개를 젓고 나면 모두가 소년의 존재에 대하여 고민해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소년이든 소년의 붉은 머리든 붉은 머리의 소년이든 모두 간절한 결여였으니까. 공백의 결여, 한 시간 다섯 시간 혹은 끝없는 하루 온종일을 천착할 수 있는 습관과도 같은 얼룩이었으니까. 그들은 그처럼 하잘것없는 얼룩에 의지하지 않고, 아무것도 응시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기에, 그들은 초점을, 가상의 초점이라도 잡지 않으면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기에, 늘상 같은 커피의 가격이나 차비, 전기세와 수도세, 책과 책의 가격을 비교하지 않고서 살아가는 방법은 알지 못하기에.
소년은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난 당신들을 알고 있어요.
그들은 소년의 말을,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말, 어쩌면 소년이 내뱉은 적도 없는 말, 그들은 그 말이 실재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녹음되지 않은 음성, 기록되지도 않은 음성은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으니까. 음성에는 문자도 결정도 없으니까. 달빛 아래에 켜켜이 쌓여드는 여가수의 노래처럼, 천 년이 지나도 플레이되는 죽은 여가수의 목소리처럼 그렇게 남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감히 소년이 무슨 말을 했는지 소년의 말이 있었던 것은 맞는지 서로에게 물어볼 수 없었고 함부로 소년을 반추해낼 수도 없었다.
난 당신들을 알고 있어요. 그의 말은 너무도 당연하고 너무도 불가해해서 조금이라도 잘못 재현해내면 순식간에 왜곡되어 원형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사내는 소년의 말이 실재한 것이라고 가정했을 때 당신들은 누구인지 나는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말은 무엇인지 일일이 의미를 따져보았고 나와 당신들이 결합했을 때, 나라는 주어와 알고 있다는 서술어가 결합되었을 때, 각각의 문장 요소들이 어떠한 의미를 반향할 수 있는지 고민해보았다. 그러나 소년이 일주일 전부터 그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인지 그 말을 하던 순간부터 그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인지, 우주를 알 듯, 세계나 비극, 모순이나 분열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알 듯 그들을 안다는 것인지, 아니면 일상적이며 통상적인 의미대로 그들의 이름과 나이, 직업이나 과거, 그들이 키우는 개와 고양이의 종, 그들이 살던 집의 위치와 가격 정보 따위를 안다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사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들은 소년을 알지 못하는데 소년은 그들을 알고 있는 것인지, 혹시 소년이 지칭하는 당신들에 사내는 속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아니, 그럴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소년은 거울처럼 반짝이는 검은 눈으로 사내를 마주보고 있었으니까. 그 창백한 응시가 사내의 얼굴을 감싸안던 순간을 사내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에게는 말과 말, 시간과 시간, 낮과 밤, 낮과 낮, 밤과 밤, 하늘과 하늘 사이의 간격을 재단할 수 있는 어떤 수단도 없었고 망가져버린 시계는 한 시 이십 분 네 시 사십 분 다섯 시 오십 분을 한 번에 가리키고 있었다. 만약 희미한 선들이 그들의 시간을 그들의 경도를 섬세하게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시간들은 모두 거짓일 것이다. 지금이 몇 시인지, 만약 지금이 한 시 이십 분이면서 네 시 사십 분이고 또 동시에 다섯 시 오십 분이 아니라면 지금은 도대체 어디에 정초하고 있는 것인지, 그들이 어디에서 나타나 어디로 사라지고 있는 것인지 그들은 알 길이 없었는데 소년은 아직도, 나는 당신들을 알고 있어요,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이와도 같이 새빨간 얼굴은 대체 어디에서 나타나 어디로 사라지고 있는 것인지 그들 중 아무도 모르는 것이 확실했다. 그들은 모두 소년처럼 새빨갛고 소년처럼 부드러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서 소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들 중 누군가가 소년의 이름을 물어보았을 때도 소년은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하늘처럼, 내려다보아야 할지 올려다보아야 할지 더는 알 수 없는 하늘처럼 불가해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당신들을 알고 있어요.
그들은 소년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야 했고 끔찍한 무력감마저 치밀었다. 검은 머리의 여자는 갈빛의 위액을 구토했고 소년은 아직도 웃음을 잃지 않은 보드라운 얼굴을 휘휘 저으며 나는 당신들을 알고 있어요, 하고 중얼거렸다.
사내는 소년이 대체 그들의 무엇을 알고 있다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사내도 사내에 대해서, 사내가 아닌 다른 군중에 대해서, 우주 속을 떠돌고 있는 이 가련한 미아들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으니까. 그는 그들의 이름도 성적 취향도 병력도 집의 소재지도 애완동물의 종도 알지 못했으니까. 대체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인지, 사내는 자신의 이름도 성적 취향도 병력도 집의 소재지도 애완동물의 종도 알지 못했는데, 대체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인지 사내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아마 소년은 사내가 소년을 아는 만큼, 사내가 사내를 아는 만큼 사내를 아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설명이 되었다. 때때로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고 떠벌리는 법이니까. 정반합으로 소용돌이치는 지양의 역사를 이해한다고, 모순이 하나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잠재하며 화합할 수 있는지 이해한다고 믿는 법이니까. 그러나 여자와 여자 아닌 것, 사람과 사람 아닌 것, 절망과 절망 아닌 것은 한자리에 공존할 수 없으니 그러한 믿음은 오해, 착각, 함정에 불과했다.
소년은 자신이 람세스 호텔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서 일을 해왔다고, 객실 청소를 해왔다고. 그들은 귀신에 홀린 듯 멍하니 소년의 육감적인 입술을 들여다보며 붉은 고깃덩이가 제 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선보이는 모양을 감상했다. 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끔찍하게 말라붙은 건식도, 입안에 척척 달라붙으며 그들의 살을 할퀴는 냉동식도 더는 먹고 싶지 않았다. 검은 머리의 여자는 그녀의 몸만을 역류하였고 그들은 그들을 배설하였고 더는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소년의 육감적인 입술도, 그의 붉은 입속에 들어찬 고깃덩어리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소년을 들여다본 것은 그를 탐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식욕이나 성욕에 이끌렸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어떻게 그들을 알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쩌면 소년이 그들을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휩싸여, 그들 자신도 모르는 그들의 이름, 그들의 성별과 성적 취향, 집의 소재지와 애완동물의 종명 따위를, 그들이 가진 적도 없는 이름과 성별과 성적 취향과 집과 애완동물 따위를 돼지머리 앞에 꿇어앉은 영험한 무당처럼 한순간에, 아무런 인연도 없는 타인의 과거와 미래를, 그가 싣고 다니는 운명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평생을 살아온 사람도 알지 못하는 불운의 역사를 파악하여 줄줄이 읊어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무당이 아니었고, 두 눈은 날카롭게 희번덕거리지도 않았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지도 않았으며 파랗게 굳어버린 잉크와도 같은 피를 뚝뚝 흘리는 돼지머리 앞에 앉아 있지도 않았다. 소년은 그들의 이름과 성별과 성적취향과 불행과 병력에 대해 일러주지 않았고, 그들은 소년의 말을, 그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 같은 말을 하염없이 듣고 있었고, 헐벗은 성기처럼 꽃잎이 벗겨져나간 꽃처럼 치명적인 생기로 으무러지는 입속에서 소년은 불현듯, 람세스 호텔에서의 죽음은 명예로운 일이죠, 하고 말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년은 다시,
람세스 호텔에서의 죽음은 명예로운 일이죠, 난 일반적인 객실 청소부와는 달랐어요. 내가 치워야 할 것은 정액과 생리혈, 간혹은 와인, 오줌이나 똥이 이리저리 어질러진 침구가 아니라 시체였으니까요. 마네킹도 아니고 사실적인 그림도 아닌, 누군가를 놀라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허구가 아닌 정말 시체, 수건걸이에 스카프를 매인 목, 거꾸로 뒤집어진 채, 역반사된 세계를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세계를, 다리는 위에 머리는 아래에 세면대는 하늘 높이 치솟아 있고 거울들은 뒤집어진 세계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다시 뒤집혀 있어요. 샹들리에는 바닥에서 피어난 꽃처럼 하늘거리고 플라스틱 이파리를 치렁치렁 감아올린 식물들.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알 수 없는 식물들.
나는 거꾸로 뒤집힌 머리를 꺼떡거리면서 그녀의 죽음을 평가하죠. 왜냐하면 나는 그들 죽음의, 람세스 죽음에서의 모든 죽음의 감독관이었으니까, 하잘 것 없는 죽음 별로 특별하지 않은, 단칸방에서의 고독사만큼이나, 노인들의 자살만큼이나 흔하디 흔한 죽음 그다지 공포스럽지도 매혹적이지도 비참하지도 않은 숱한 죽음은 내 손으로 거두어들였어요. 나는 그녀의 목에 휘감긴 스카프가 얼마나 고급인지 얼마나 미적인지 살펴보았고 하늘색, 하늘색은 백색보다도 더욱 중립적인 색이기에, 붉은색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노란색처럼 촌스럽지도 않은 색, 나는 푸른빛으로 변해버린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어요. 그녀의 긴머리, 짙은 속눈썹과 눈물점은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것이니 앞으로 몇 개의 조건만 더 성립되면 그녀는 스타가 될 수 있을 것이었죠. 그녀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어요. 나는 그녀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녀의 매캐한 입술에 입을 맞추며 당신은 선택받았다고 중얼거렸어요. 착각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더 환하게 웃는 것 같았고 희미한 하늘빛은 더욱 희게, 혹은 푸르게, 아니, 당신들이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희면서도 푸르게 짙어졌어요. 난 시트 위에 어질러진 그녀의 파우치에서 붉은색 립스틱을 찾아-립스틱은 끈적끈적하게 녹아내렸으니, 여름철 소녀의 손아귀 위에서 형언할 수 없이 비참한 질감을 남기며 흘러내리는 설탕과자처럼-수증기가 부옇게 어린 거울을 아직 사용하지 않은 배스타월로 훔쳐낸 뒤 그 위에 그녀에게 어울리는 문장을 적어내렸어요. 뒤집어진 그녀가 마주볼 수 있도록 거꾸로 적어내린 문장을.
난 그저그런 호텔 객실 청소부가 아니었죠. 수천 명의 자살자들을 화려한 죽음을, 도발적인 흔적을 갈망하는 실패한 시인과 실패한 청소부와 실패한 연극배우, 실패한 가수와 실패한 사업가, 실패한 소설가와 실패한 철학가들을 선발하는 연출가였어요.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어요, 박사학위시험에서 떨어진 독일의 사상가와 보험회사에서 쫓겨난 소설가, 안네의 일기를 쓰지 못한 수필가는 공업용 밧줄로, 일말의 낭만성도 없는 밧줄, 자살에는 실패하지 않을지 몰라도 연극에는 실패할 것이 분명한 그런 투박한 밧줄로 목을 맸어요. 그래서 나는 그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줄 수 없었죠. 그들의 죽음은 호텔 람세스에 어울리는 명예로운 죽음이 아니었으니까. 한낱 실패한 자들의 죽음, 죽음으로 유명해질 일은 없는 촌부들의 죽음, 하루에도 수십 구씩 떠오르는 강물 속 익명의 죽음, 절망에 취한 물고기들이 눈을 감고 뜯어먹은 얼굴과도 같은 흐릿한 죽음이었으니까. 나는 그들의 발밑에 흘러내린 흥건한 오물을, 그들을 닦아내었고 그들의 시체는 수천 수만 명은 되는 흔하디 흔한 자살자들과 함께 강밑에 던져졌으니 그들은 날이 따뜻해지면 흰빛의 꽃잎들과 함께 매캐한 꽃향기와 함께 강 위로 둥둥 떠오를 것이고 절망을 표현할 언어라고는 날카로운 이빨과 헤엄밖에 갖지 못한 물고기들이 그들의 얼굴을 파헤치고 그들을 익명으로 돌려놓았을 테죠. 그들의 죽음은 호텔 람세스의 죽음이 아니었어요.
나는 하늘빛 스카프의 풀어진 올을 정리했어요. 그녀의 허벅다리 사이로 흘러내린 변을 닦고 그녀의 침구를 정리했죠. 붉은 립스틱으로 거울에 의미심장한 문구들을 거꾸로 그녀가 고개를 젖히고 세계를 맹시하는 방향으로 적어내렸으니 그녀는 곧 유명해질 것이었고 생애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는 명성을 누리게 될 것이니, 나는 언제나 성공한 연출가였어요. 배우들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람세스에서 연극을 하고 싶어했죠. 아무도 그들의 성공을 막을 수 없었어요.
만약 당신들이 어떠한 파장도 일으키지 못하고 논문도 시도 소설도 출판하지 못하고 강물 밑으로 내던져진 실패한 시인과 실패한 학자와 실패한 소설가, 실패한 수필가에 대해서 캐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호텔 람세스의 죽음이 아니니까, 나는 역량이 모자란 그들, 립스틱도 시가도 구비하지 않은 그들, 늘어진 뱃살과 가슴, 하염없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비참한 몸뚱이를, 얼굴조차 없는 머리를 캐스팅한 적이 없으니까. 그들은 우리의 배우인 적이 없었고, 엷은 하늘빛의 스카프로 목을 맬 미적 감각조차도 없는 이들, 그들에게는 취향이라는 것이 없었죠. 하나같이 단단하고 투박한 공업용 밧줄, 그 밧줄에 두꺼운 목을 걸고서 고개를 거꾸로 젖히지도 않고 앞으로 수그리고서 세상에, 앞으로 고개를 수그리고 죽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어요. 우리는 항상 앞으로 굽어가고 앞으로 기울어지고 앞으로 넘어지고 앞으로 부러지며 죽어버리기 마련이니까. 그들은 단 한 번만 생애 내도록 지속되어온 무감하고 비천한 효용의 버릇으로부터 벗어나면 되었는데. 단 한 번만, 생을 포기하는 단 한 번만 폐렴에 걸려 꼭꼭거리며 미쳐 날뛰는 암탉처럼 촌스럽게 굴지 않으면 되었는데. 그 단 한 번 단 한 번이 그들에게 영생과 기적을 선사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숱한 여배우나 가수, 희극 작가보다도 더욱 유명해질 수 있었어요. 모두에게 기억될 그런 불길하고 매혹적인 죽음을 상연할 수 있었단 말이에요. 무척 유감이에요. 일상에 마비되어버린 감각을 조금이라도 되찾았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기지를 발휘했다면, 시신에서 배양한 나무로 악기를 만들던 예술가의, 투명한 손으로 유리 피아노를 연주하던 여배우의 흉내라도 내어보았더라면, 그들은 군중의 악몽 속에서, 공포 속에서 영생할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이 되지 못했던 유명한 시인보다도, 유명한 작곡가보다도 유명한 소설가보다도 더 크고 무참한 광채를,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무척 유감이에요. 그들은 끝까지 촌스러운 무취향으로부터, 폐경기를 맞은 누구에게나 도래하는 감상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나는 그들의 다 늘어난 줄무늬 속옷이 너무 부끄러웠던 나머지, 헐거워진 고무, 누런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낡은 걸레와도 같은 몸이 너무도 수치스러웠던 나머지 그들을 두고 볼 수가 없었어요.
그들은 호텔 람세스의 자살자들이 아니었어요. 사람들의 밤을 활보하며 매혹적인 이를 드러내며 웃을 악몽의 여인이 아니었죠. 그들의 이는 커피와 담배에, 매캐한 연기에 찌들어 누렇게 변색된 이는 유령의 보석과도 같은 이가 아닌 사람의 이였어요. 심지어는 조금도 위험하지 않은 사람 말이에요. 그들의 자살은 거의 모든 것들이 시도되었고 거의 모든 것들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오직 그들의 실패만이 유일하며 단발적인 사건이라고,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도끼로 쳐부수고 산산조각난 세계 앞에서 염을 외며 굿을 하던 예술가의 시도와도 같았죠. 미술관을 작은 소변기로 테러하고 무대 위에 오물과 같은 침묵을 끼얹던 그들의 퍼포먼스가 역사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이미 시도되고 이미 성공하고 또 실패한 작업을 반복하려는 그들의 움직임, 매혹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흔해빠진 부랑자의 누런 이빨들은 실패의 재현에 불과했어요. 더 이상 재현을 구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그들도 알아야 했는데. 그들은 이미 소녀의 팔목보다도 굵고 단단한 공업용 밧줄에 목을 매고 눈을 닫고 입을 닫고 기도를 닫고 귀를 닫고 죽어버렸어요. 그들은 얼굴을 잘못 찍어낸 마네킹 폐품과도 같았죠. 눈을 닫고 귀를 닫고 입을 닫은 그들에게 하는 충고는 눈도 귀도 입도 없는 고무인형에 대고 말을 하는 일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 나는 백치도 자폐증자도 아니므로 인형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고 그들에게 충고를 하는 일도 없었어요. 더 이상 그들을, 검푸른 강물 속에 던져버린 그들의 얼굴을 기억할 수도 없었어요.
여자는 희미하게 웃으며 죽어 있었고 어쩌면 그녀의 미소도, 그녀의 연푸른 스카프도 이전에 시도되었고 이전에 실패했던 시도인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기적과도 같은 우연으로 특별하였고 매혹적이었으며 그러한 아름다움은 의도적인 구조나 설계에 의하여 획득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그녀가 호텔 람세스의 자살자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난 수증기에 젖어 축축한 볼을 쓰다듬고 그녀의 푸른 입술에 입을 맞추고 그녀에게 더 기괴하고 비틀린 자세를 주문했죠.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더 짙게 물들였고 하늘빛 스카프는 더 희고 더 푸르러졌고 나는 연극무대를 빠져나가 비명을 질렀으며 각자의 객실에서 각자의 자살을 연출하던 배우들, 화장도 끝마치지 못한 채 반만 분을 바른 기묘한 얼굴들, 립스틱은 윗입술만 혹은 왼쪽 입술만 붉게 물들였고 귀걸이는 왼쪽 귀에만 치렁치렁 매달렸으며 매듭이 묶이지 않은 배스가운은 당장이라도 벗겨질 것처럼 부드러운 어깨 아래로 미끄러졌고 콧수염은 모래 속에 파묻힌 싸구려 인형의 머리칼처럼 이리저리 뻗쳐 있었으며 면도되지 않은 다리에는 검은 거미들이 기어다녔고 코러스들은 잔뜩 쉰 목소리로 헐거운 화음을 질러내었어요. 만족하지 못한 나는 문 안쪽을 가리켰고 파열의 불길함을 알아차린 코러스는 내 신호에 따라 전보다는 더 카랑카랑한 목소리, 전보다는 더 날카로운 불협으로 비명을 질러냈어요. 시사회를 장식하는 무수한 성공한 기자들 성공한 카메라와 성공한 손가락, 성공한 펜과 성공한 울음, 성공한 문장들. 그렇게 내 손으로 발탁해낸 배우들이 수십 명이에요.
놀라지 마시길, 나는 당신들을 알고 있고 오래전부터 당신들을 기다려왔으니까요. 실패한 시인, 실패한 마술사, 실패한 혁명가, 실패한 도둑과 실패한 학자, 당신들의 작품은 한 번도 출판된 적이 없으며 당신들의 공연을 보러 오는 자는 없고 당신들의 폭탄은 불발하였고 당신들의 논문은 어디에도 게재되지 않았고 당신들의 범죄는 들킨 적이 없어요. 그러므로 당신의 시도 마술도 혁명도 범죄도 논문도 모두 없던 것이었죠. 그러나 호텔 람세스에서 당신은 배우가 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자살극은 언제나 성공하는, 지나치게 난해한 서사시와도 같은 것이니까. 만약 당신들이 생애 최후의 기지를 발휘한다면, 성공하지 않았던 유년을 성공시킨 프루스트와도 같이, 죽음을 상연하는 데에 성공한 하멜른의 쥐들과도 같이 성공한다면, 당신들이 당신들의 실패를 성공시킨다면, 나는 당신들의 죽음을 본딴 피규어를 만들고 당신들의 부러진 목을 본딴 그림을 팔고 당신들의 죽음을, 재현할 수 없는 죽음을 수천 장 수만 장 아니 수억 장은 재현하여 판매할 수 있을 텐데. 당신은 평생토록 죽을 수도 있을 텐데. 만약 당신들이 호텔 람세스로 온다면 그래서 나의 배우가 되어준다면 만약 당신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언제든지 당신들의 객실을 청소하거나 연출할 수 있어요. 당신들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모험을 할 필요도 없고-당신들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옥상에 출입할 수 없을 것이니- 수십 명의 무관한 남들을 죽여 묻을 수고를 할 필요도 없고 살 수도 없는 피아노를 깨뜨릴 필요도 없어요. 당신들도 알다시피 그런 일들은 전부 당신들에겐 불가능한 일이니까. 당신들이 미감의 비관과 지성의 정체 상태에 빠져있지만 않는다면. 나는 당신들을 알고 있어요, 하고 소년은 반복해서 말했다.
그들은 소년의 말을 소년을 조금도 이해하지 않으면서 소년이 하지 않는 말을 들었다. 그들이 표류하고 있는 우주에는 호텔 람세스도 하늘빛 스카프에 목을 맨 여자도 없었으니까. 객실 청소부도 죽음을 연출하는 신비로운 예술가도 없었으니까. 소년이 그들에게 하는 말은 그들이 낯선 우주 속을 떠돌고 있다는 말만큼이나, 언젠가 그들에게 고향이 있었다는 말만큼이나 그들이 언제나 이토록 불가해한 우주에 속해 있었다는 말만큼이나 거짓이었으므로 그들은 소년에게 어떠한 대꾸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간단한 제스쳐도 없이 그의 말을 하염없이 들었다. 다만 소년이 당장이라도 말을 그치고 그들을 침묵으로 응시할까 두려워하며. 왜냐하면 그들은 침묵이 끔찍이도 두려웠으니까. 우주 속에서의 침묵은 도시에서의 침묵과도 시골에서의 침묵과도 달랐다. 우주에서의 검음은 더 이상 지상에서의 검은빛이 아니었다. 침묵은 조용하지도 감미롭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우주에서의 침묵은, 셀 수도 없는 기록할 수도 없는 재현할 수도 없는 유일하게 현시되는 침묵은 절망적으로 단단했고 그들은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 오아시스의 물 속에 알몸으로 들어가 목욕을 하는 사막의 방랑자들처럼 그들은 소년의 축축한 입술 속에서 흘러나오는 거짓에 귀를 기울였다.
소년은 홀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벌려진 틈에서 그는,
물론 우리가 무명의 배우들만 발탁하여 기적과도 같은 자살극을 상연하는 것은 아니에요. 얼굴이 알려진 자들의 죽음은 반드시 발탁되기 마련이니까, 유명한 이들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죽더라도 죽음을 출판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더 유명해지고 싶은 이들, 더 극적인 죽음을 원하는 이들은 호텔 람세스에서 그들의 고상한 취향에 걸맞는 오로라빛 조개 목걸이로 목을 장식하고 죽고는 하죠. 비틀거리면서 기어가는, 비틀거리기 위해 기어가는 몸짓을 전부 카메라에 담는 배우도 있어요. 우리는 CCTV 앞에서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는 그들의 기이한 모습을 전부 송출하죠. 난 당신들을 알고 있어요. 당신들이 영원한 무명 배우라는 것도, 이곳 호텔 람세스에 찾아온 이유도. 객실들은 문도 없이 열린 채로 끝없이 이어져 있죠. 하지만 함부로 남의 객실을 훔쳐보는 고객은 없어요. 자신의 우울에 골몰하는 병자들에게 타인의 병실은 열린 채 비어 있는 법이니까.